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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영문판 표지
아도르노에 따르면 '근대'는 특정 시기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어떤 특징을 가리키는 '질적 개념'이다. 우리가 논자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근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의 답변을 마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야할 이상향으로서 근대가 제시되건, 오늘날 사회 문화의 온갖 문제들의 근원으로 근대가 상정 되건 여기서 근대는 어떤 특징과 성향을 보여주는 시대로 이해해야지 객관적 시간의 어느 시기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근대가 질적 개념이라는 것은 누가 근대를 얘기하건 간에 그 안에는 논자 나름의 성찰이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논자가 근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대한 어떤 나름의 원인(혹은 메커니즘)분석과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몇 년간 근대 혹은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는 저작 혹은 작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여기'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의 예증일 것이다. 앞으로 필자는 근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들을 소개할 생각이다. 미약하나마 독자들이 '지금, 여기'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를 얻게 되길 바라며….

첫 번째로 우리가 같이 읽어볼 책은 파크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이다.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이나 서평이 너무 많아 식상한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대단히 다양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책이다. 이는 물론 소설 장르의 장점일 수도 있겠다. 다양한 읽기 방법 중에 지금 추천할 이 책의 독해 방법은 근대성 비판과 이 소설을 연관지어 읽어보는 것이다.

일단 근대성 운운 때문에 꺼림칙할 독자들에게 강조하지만 이 책은 과거와 지금의 꾸준한 판매부수가 보장하듯 재미없는 책이 아니다. 다른 쥐스킨트의 소설에 비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드라마틱한 서사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비둘기'나 '콘트라베이스', '깊이에의 강요' 등의 중단편들은 특이하긴 하지만,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못한 게 사실이 아닌가? 이 책은 쥐스킨트답지 않게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특유의 분위기는 유지한 채 말이다.

근대성의 특성에 대한 진단으로서 세계의 의미와 가치의 준거로서 '주체'가 내세워진 것을 내세우는 사람이 많다. 고대의 문제설정이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면 근대의 문제설정은 이제 주체의 입장, 즉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근대 이성의 계획은 주체가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지배해갈 것인 가였다.

다른 동물에 비해 아무런 육체적인 장기가 없던 인간에게 이성은 세계의 두려움과 강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투명하고 전능한 이성의 힘에 의해 객체가 평정되고 주체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데서 근대의 자기기만과 파탄은 시작되었다. 인간이라는 주체는 객체인 자연의 일부였고, 주체에 의해 평정되어야할 세계는 까뮈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처럼 생겨 먹지는 않은 말 그대로 '부조리'한 것이었기에….

<향수>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의 생애는 이런 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그 성장과정, 그리고 파국까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성의 힘에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던 근대적 주체는 절대적인 경지의 향수에 집착하는 쥐스킨트의 악마와 닮아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관적 어조로 이성의 재앙을 예견한 <계몽의 변증법>의 소설판 버전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1.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주인공

근대적 이성의 계획은 주체의 위치에 관계없는 객관적이고 영원한 과학의 건설이었다. 그런데 그런 과학을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자신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부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주체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그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불가능해지고 또한 자연에 대한 지배역시 자기기만적인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근대적 주체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선입견도 없는 투명한 것이어야만 했다.

쥐스킨트의 이 매력적인 악마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향수 발명가라는 것. 자연의 특성을 가지지 않고 그 외부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등장한다는 것. 쥐스킨트는 이 소설의 출발부터 자기가 객체의 일부라는 것을 부정함으로서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었던 주체의 어긋난 계획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2. 죽여서라도 '냄새'를 얻어라!

근대적 이성은 '영원한' 가치가 될 만한 것이 진리라고 믿어왔다. 수시로 변하는 것은 이성의 논리적 체계 안에 포섭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공시적인 구조를 좋아하는 이성중심의 근대 사유에서 수시로 변화하는 것들은 열등하고 가치 없으며 심지어는 제거 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믿어졌다. 개구리의 영원한 생물학적 본질을 위해 배를 잡아 째고, 꽃의 영원한 본질을 알기위해 꽃을 쥐어뜯고 분해하는 탐구방법은 전형적인 근대의 것이다.

그루누이 역시 절대적인 향기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변화하는 것'들과 함께하는 가치, 그것이 '살아있는' 자연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루누이는 보다 좋은 향기를 얻기 위해 심지어는 소녀들을 살해하기도 하는데, 소녀를 죽여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가치를 얻으려 하는 그루누이의 광기는 근대 과학자의 그것과 일치한다.

3. '진리'를 얻었으나….

근대적 이성은 과학을 통해 주체가 객체(자연)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행사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객체가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배경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될 때 역설적으로 주체는 '객체'를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거울과만 교류하는 기만적인 존재가 된다.

그루누이는 각고의 노력(살인마저 포함한) 끝에 절대적인 향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뒤에 온 것은 자연에게서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제외한 모든 것. 즉, 내용 없는 향기이자 덧없음이다.

근대적 역사 발달의 절정은 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지 못했는가? 객체를 자기가 파악하고 장악할 수 있는 것으로만 설정함으로써 객체를 모두 죽음으로 이끈 근대적 이성, 그 파국이 그루누이가 빠진 절망적인 덧없음이다.

4. 뒤집어진 '성경'

이 소설의 이야기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에피소드들을 교묘하게 뒤집고 있다. 이를테면 똑같이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축복받는 예수에 반한 버려지는 그루누이. 복음과 사랑을 전하기 위해 광야를 헤맸던 예수에 반한 살인도 불사하는 광기로 향기를 찾는 그루누이. 등등

이제껏 예수 못지않게 근대적 이성이 내세우는 과학의 이념은 추앙받아 왔다. 그러나 무수한 탈근대 담론이 지적하듯 그 과학이 달성한 세계는 힘의 논리와 패권주의가 판을 치는 '테러'로 '재앙'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쥐스킨트는 성경을 패러디하여 세계를 탈 신화화한 근대 이성이 또 하나의 '신화'에 불과함을 꼬집고는 그 뒤의 '덧없음'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근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진행할 때가 도래하였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열린책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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