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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신조에 실렸던 기사 전문 1/4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3일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최근 한일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의 요구는 반드시 역사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저는 매일 아침 마치 내일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날뛰는 일본 매스컴의 뉴스를 들으면서 눈을 뜹니다. 신문을 보면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말이 어느 신문에나 1면 기사로 등장해 있고 한국인들은 독도라는 종교에 푹 빠진 광신도들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배를 찌르고, 목사들과 군인단체들이 화형식을 거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국인들 전체를 비이성적인 인간들로 표현함으로써 일본 자국민들에게 반사 심리를 얻으려고 하는 일본 매스컴과 우익들과 정부의 심리 작전은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증거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말이 100퍼센트 실리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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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본에 독도를 돌려줘야 한다"

저는 얼마 전 일본인의 살아 있는 생생한 생각을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제가 다니고 있는 일본 회사의 직장 동료들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의 내용은 '독도에 관한 일본인의 생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인터뷰는 기사화되었고 몇 개의 글들이 댓글로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 댓글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것보다 비이성적인 일본인 비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저의 인터뷰에 응해 준 일본인 직장 동료는 그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저에게 <주간신조>라는, 우리나라의 '월간 조선' 같은 종류의 극우 잡지의 한 기사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자신은 이런 근거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 기사를 번역하여 싣겠습니다. 이것을 싣는 이유는 이것이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역사적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반박할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반박문을 기다리며 이글을 씁니다.

아래는 사쿠라이 요시코가 <주간신조>(4월 7일자)에 기고한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검증한다'라는 글을 요약·번역한 것입니다. 이글을 쓴 사쿠라이 요시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 논객으로 활발히 방송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정치 평론가입니다.

다케시마-영유권을 검증한다

사쿠라이 요시코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 관계는 이미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3월 23일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 4월로 예정되어 있는 역사교과서 검정결과 발표 등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정당화 하고 또 다른 패권주의를 일으켜 세우려는 (일본의)의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라고 다음과 같은 의지 표명을 하였다.

"지금까지 일본에 대하여 말해야만 하는 것, 주장이 있어도 (한국 정부는) 참아 왔다. (한국의) 피해자들의 비통한 절규를 듣고서도 (한국 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피해자가 진상규명을 하려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정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 외교적으로도 강경하게 대처하고,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요구 할 것이다"라고. "힘든 외교 전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이번 싸움은 하루 이틀에 끝날 싸움이 아니다. 지구전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3페이지를 넘기는 장문의 메시지는 "우리들은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으나, 냉정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것이 말뿐이라는, 대통령 자신이 냉정함을 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 일들의 발단을 돌아보자. 3월 1일 독립 기념 운동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 연설의 대부분을 일본 비판에 할애하였고 일본에게 과거역사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였다.

시마네현 의회가 2월 22일 다께시마의 날로 제정한 것을 발단으로 3월 17일 한국정부는 국가안정보장의회(NSC)를 소집, '대일 신 정책'을 발표해 "독도 문제에서의 '도발'은 과거의 식민지 침략과의 동일한 행위로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대일 신 정책'의 발표 도중 정동영 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장관이 "기존의 한일협정과 관계없이" 일본 측에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한다고 말한 점이다. 기존의 한일협정이란 1965년의 일-한 기본조약일 것이다. 이것은 양국이 체결한 국제 조약을 거부한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상식의 틀을 벗어난 이 노선은 노무현 대통령의 노선 그 자체이다.

3월 20일 노무현 대통령은 예정 시간을 넘겨가면서 라이스 미 국무부장관에게 다케시마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영유권이 한국 측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설명하고 한국의 입장에서의 지지를 구하려 하였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모두의 대통령 연설이 있었던 것이다. 정책의 실패로 인해 한때는 20%대로 떨어진 대통령의 지지율은 대일강경론을 부르짖는 것에 의해 회복해 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민을 이토록 뜨겁게 만드는 반일 감정, 특히 강력한 불씨가 되는 다케시마 문제. 대통령도 국민도 도대체 어떤 이유로 다케시마가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다케시마 문제의 제1인자 타구쇼구 대학의 시모죠마사오(下條正男) 교수는 다케시마 문제는 문제 자체를 넘어서 일본의 역사를 배우고 일본 재생으로 이어져야 할 과제라고 강조한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제쳐두고 한국에서는 다케시마의 역사를 배우지 않는 국민이 없다. 한편 일본은 어떠한가? 한국인에게 뒤처지고 있다. 다케시마는 결코 미미한 섬의 문제가 아닌 나라가 존재하는 방식과 역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잘못 고쳐친 역사서

일본인보다 더한 열정을 담아 다케시마를 주시하고 있는 한국은 일본이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라고 하기 한참 전인 6세기 초반부터 다케시마는 조선령이었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1770년에 쓰여진 <동국문헌비고>라는 문헌이다." 시모죠 교수의 해설이다.

"이 문헌 중에 울릉, 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의 소위 마쯔시마에 해당한다고 써 있다. 예전에 일본은 다케시마를 마쯔시마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울릉도도 우산국도 512년에 신라에 편입되었기에 독도는 그때부터 조선령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그 문헌에 등장하는 우산도가 정말로 일본의 마쯔시마, 즉 현재의 다케시마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산도는 다케시마가 아니었다. 시모죠 교수가 설명했다.

"한국 측 주장의 근거인 동국문헌비고에서 인용한 여지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여지지의 기술이 정말 그런 내용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중략)

마찰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장하라

한국 측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독도는 일본령이라고 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포기하고 한국의 영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점에 대해 국립국회도서관 참사인 츠카모토 다카시가 쓴 논문의 요지이다.

"1951년 미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초안을 작성하여 관계국에 통지했다. 한국은 전쟁에 승리한 나라는 아니지만 의견을 말한 기회를 부여받았다. 거기서 1951년 7월 양우창 주미한국대사가 달라스 미 국무성 고문을 방문해 요청하였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방기하는 영토로서 미국의 초안이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라고 쓰여 있는 것에 '독도, 파랑도'도 첨가해주길 바란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파랑도는 제주도 앞바다에 있는 수면 밑 5미터의 암초로써 영유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독도, 다시 말해 다케시마에 관해서는 달라스 장관이 조선합병 전에 조선령이었는가를 물었다. 양 대사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달라스는 그렇다면 일본이 포기해야 하는 영토에 독도를 포함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1951년 8월 10일 미국은 한국에 서간으로 정식회답을 하였다. 하지만 서간에는 한국의 다케시마에 관한 요구에 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독도 혹은 다케시마로 알려져 있는 섬은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의 일부로 사용되었던 것이 한번도 없고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 현령지부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 섬은 조선에 의해 영토 주장이 있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고 써있다.

양 대사의 거짓 설명은 인정되지 않았다. 외교 교섭에서 다케시마를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이승만 정권은 그 다음해 1952년 1월 18일 샌프란시스코강화 조약이 발효될 4월 28일을 앞두고 국제법을 무시한 인접해양의 주권을 주장하여 공해상의 이승만 라인을 그어 그 안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1954년 9월 2일에는 독도의 무력 점거를 결정하고 경비병을 배치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오래된 문헌을 집중해서 조사했던 시모죠 교수의 연구 결과와 맞추어 보면 그들의 주장이 거짓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 주장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국제법도 외교의 상식도 무시한 차원에서 글자 그대로 힘으로 밀어붙인 전술이 전개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논리성은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다. 하지만 일본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명확한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것을 근거로 한 반론을 왜 당당하게 펴지 못했냐는 것이다. 항상 물러서 있는 듯한 자세로 항의를 한다. 마찰을 두려워해 참는다. 이런 것이 국가인가? 정부인가? 이런 일본 외교의 틈을 노리고 한국 정부는 다케시마에 등대 항구를 건설하고 관광 편까지 개설했다.

많은 일본인은 한국의 실효 지배가 확실히 진행되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영유권 논쟁이 일어난 후의 조치는 국제사법재판에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다케시마에 대한 현재의 실효 지배는 국제법상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일본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케시마는 일본령이라는 근거로서 시모죠 교수들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한국 측의 자료를 이용하면서 정부 수준으로 광범위하게 국제 사회에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의 실효 지배는 국제법상 무의미한 것도 잊지 않으며 끈기 있게 일본의 주장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찰은 일어난다. 하지만 마찰을 두려워하는 한 사태는 개선되지 않는다. 필요한 마찰은 피하지 말고 국제 사회에 설명을 계속함과 동시에 건전한 일한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협력을 일본이 요청하는 것이다. 여력이 적은 쪽은 수비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그 후 공격의 자세로 바꾼다. 여력이 있는 일본이 일본을 계속 거부하는 한국에 정론을 주장하면서 미래를 향하여 협력의 손을 뻗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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