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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잘리던 교문의 끔찍한 기억을 학교를 떠나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잊을 수 없다.
머리 잘리던 교문의 끔찍한 기억을 학교를 떠나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잊을 수 없다. ⓒ 서강훈
학교 내에서 간과되고 있는 인권에 대한 담론은 사실 예전부터 있어왔다. 그 예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학교와 군대의 공통점을 열거해 보자는 흔한 이야기다. 학생들은 머리가 짧아야 한다. 군인들도 머리가 짧아야 한다. 교실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내무반도 감시하기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에게 반항하면(맥락상 이성적인 반발도 포함) 맞아야 한다. 군인도 상관에게 반항하면 그에 응당한 조치(?)를 받고 정신 차려야 한다.

이 우스갯소리 속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머리에 관한 것이다. 맥락상 학생은 시쳇말로 '군바리'가 아닌데 왜 머리가 꼭 짧아야 하는가에 대해 강한 반감이 서려 있다. 그것도 강제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그들의 반발을 증폭시키는 기폭제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반감이 요즘 들어 학생들의 시위 형태로, 얼마 전 청소년 인터넷신문 <바이러스>에서 주최한 청소년 대토론회로 분출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럽고 또 건강한 현상이라고 본다. 학교에서 마련한 교칙이란 것은 시대의 흐름과 지나치게 역행하고 그런 주제에 철저히 지켜질 것을 강요해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강압적으로 가위를 들이대는 행태는 시대착오적인 폭력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단합하여 큰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움직임은 어찌 보면 늦은 처사일 것이다. 늦게나마 그네의 목소리를 환영하고 격려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 문제는 앞서도 짚고 넘어 갔지만 하루 이틀 있어온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다. 왜 그런가에 대해서 고찰 할 필요가 있다. 한계점이 명백하다는 점이다.

먼저 가장 큰 한계점은 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의 입지가 지나치게 좁다는 점이다. 학교의 주인은 교원이나 행정실 직원이 아니라 학생들이다. 비록 그네가 '교육을 받는' 입장이지만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이루는 대다수는 학생인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통제를 받을 뿐 주체적으로 학교 측에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여러 입안을 하는 데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네들에겐 발언권이 없다.

가까이 대학의 경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많은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대학을 이루는 주체는 학생들이다. 대학이라는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학생의 입지를 간과하지 못한다. 만일 총장과 교수들이 결탁하여 대학생들에게 억압적인 교육을 시키고 두발 단속을 한다면 학생회를 필두로 모든 대학생들이 격렬히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권한을 가졌다고 사려되는 학교 측에서 학생들을 전혀 배려하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학생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지 않고, 학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구시대적 처사다.

학교 측에서 그렇게 나온다고 당해만 왔던 학생들도 문제가 있다. 허울만 좋은, 모범생들의 엘리트 집단인 학생회는 학생들을 위해서 무얼 했나?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자기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학생회를 욕만 했지 학생회가 무엇을 하는 기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행정과 교육 이상이 따로 노는 교육의 전반적인 현실도 한계점으로 작용한다. 제7차 교육 과정에서는 학교 급별 교육 목표를 소개하면서 중학교 교육 목표에 "중학교의 교육은 초등학교 교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학생의 학습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올바로 된 민주시민을 양성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두발 단속이라는 시대착오적이고 강압적이기 그지없는 사안을 재량권이 행사되고 있는 각 학교 교칙에 방치하여 교육행정 전반에 팽배한 얕기 그지없는 교육 철학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면서 교사들의 지침서이자 교육의 이상을 제시했다 할 수 있는 교육 과정엔 민주시민 양성을 보란 듯 명시하고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다시 두발 단속 문제를 천명한 학생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수년 내로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떠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두발 단속을 악몽으로 여겨 철저히 망각하고, 적어도 무관심의 영역으로 날려 보낸다.

예전부터 이야기는 있었으되 두발 단속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단 한 번도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담론으로 이어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다. 지금 두발 단속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표하고 문제제기를 표한 세대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허울뿐인 담론만 던져 놓고 떠나면 후대에 와서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언제까지 '학교 군바리'로 살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학교 군바리'로 살아야 하는가. ⓒ 서강훈
마지막에 제시한 이야기는 부끄럽지만 필자 자신에 관한 처절한 성찰이기도 하다. 부끄러운 마음에 각성하여 힘겹게 장문의 글을 전개하고 있다. 다만 같은 문제 의식을 가졌으나 역시 같은 한계점으로 주저 않은 한심한 선배의 마음이 담긴 당부를 마저 들어 달라.

지금 가위질에 잘리는 머리가 후배들의 머리가 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자기 자식의 머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부디 문제 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져달라. 또한 두발 단속이라는 사안 하나에 집중하여 사회 여론을 간과하고 고립을 자초하는 치기를 보이지 말아 달라.

항상 두발 자유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강한 반발을 사게 되는 계층은 선생님과 부모님이다. 그들은 인권 침해라는 대명제를 간과한 채 현실성에 근거한 애정을 들어 당신들의 논조를 반박한다. 흔히 이렇게 말을 한다. "머리에 신경 쓸 시간에 공부를 하시지."

그네의 반발에 대해서 단순히 기성세대의 논조라 폄하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보단 당신들이 문제시 하는 사안에 대한 반박이 되는 주장의 근거를 더욱 다듬어 무기 삼길 바란다. 인류의 공감대이자 민감한 성감대이기도 한 인권이라면 더 큰 논조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자칫 머리에 집착하고 두발 단속이라는 사안 하나만 두고 넘어진다면 타당성을 확립하기 어렵고, 교실 내에 잔존하는 다른 부조리들을 간과하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사실 교실 내에는 두발 단속 말고도 인권침해에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이 생각해 보면 많다. 강압적인 0교시 운영이라던가, 일부 교사들의 근거가 분명치 않고 철저히 감정이 개입되어 보이는 체벌 따위가 그러하다. 시대착오적인 교칙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두발 단속 문제는 이러한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다뤄야 할 문제다. 머리에만 집착한다면 협상 대상인 어른들에게 이번 문제 제기가 자칫 치기어린 청춘의 반란 정도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두발 자유화 선언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더 큰 각성으로 제대로 된 민주시민 함양을 위한 교육풍토를 쟁취하고 현장에서 간과되고 있는 더 큰 맥락에서의 인권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주문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서강훈 기자는 교사를 꿈꾸는 사범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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