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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 등 해외 언론이 한국 정부의 외국자본 규제를 '국수주의'로 비난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3월 론스타 반대 집회 모습.
FT 등 해외 언론이 한국 정부의 외국자본 규제를 '국수주의'로 비난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3월 론스타 반대 집회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또 다른 국수주의인가, 외국 투기자본의 수탈에 대한 방어인가.

한국 사회가 점차 격렬한 논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외국자본을 규제할 것인가'와 '규제한다면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가'다.

지난 1997년 IMF 위기 직후 한국 정부는 속칭 'IMF팀'이라 불리는 전담반을 편성할 정도로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DJ정부는 "국가 부도를 막아야 한다"며 미국과 일본, 중동에 특사를 보내 '달러'라면 닥치지 않고 들여왔다.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는 대폭 완화됐고, 당시로선 생경했던 '빅딜'과 'M&A'라는 용어도 늘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 도처에선 '이제 외국자본에 고삐를 씌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국민의 피땀이 스민 알짜기업을 인수해 껍데기만 남기고 팔아치우는 외국자본의 소위 '선진금융기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특히 대규모 매매차익과 조세회피를 노리는 투기성 자본은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제 궤도에 오른 한국 경제의 '재추락'을 우려하고 있다. 규제를 강화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등을 돌리고, 이는 곧 한국 경제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이 '경제 국수주의'에 빠져 외국인을 차별한다면 망할 것이라는 해외 언론의 엄포도 들린다.

'외국자본 규제' 논쟁, 위기의식에서 비롯

사실 이번 논쟁의 배경에는 외국인의 비중이 날로 커져 가는 한국 경제에 대한 심각한 위기 의식이 깔려있다. 주식시장의 40%가 외국인 투자자들로 채워져 있고, 국내 상장기업 10곳 중 1곳이 M&A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일부에서는 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지난 11일 "국내 상장회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2004년말 기준 42%로 아시아 국가 중 1위, OECD 가입국 가운데 2위"라며 "사태가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자칫하면 멕시코와 같이 나라 경제가 거덜날 수 있을 만한 수치다. 여기에 뉴브리지캐피탈 등 외국계 펀드의 조세회피 행위가 알려지면서 국민 감정은 더 악화되고 있다.

이 같은 위기 의식으로 시작된 논쟁은 세 갈래로 이뤄지고 있다. 첫째는 외국자본이 과연 우리 경제에 폐해를 끼치고 있느냐는 점이다. 두 번째는 어떤 외국자본을 규제하느냐는 것, 마지막으로는 규제의 방법이다.

외국자본이 과연 폐해를 끼치고 있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엇갈린다.

투기자본감시센터(대표 허영구) 등은 외국자본이 알짜기업을 헐값에 매입한 뒤 유상감자와 고배당을 통해 국부를 유출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한 조세회피도 당연히 비난거리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최근 보고서에서 "외국자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기업이 현금투입형 경영권 방어에 나서게 돼 투자가 축소되는 등 경영활동이 위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자본 때문에 기업이 투자보다는 경영권 방어에 나서 결과적으로 악영향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최근 LG경제연구원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놨다. LG경제연구원은 "외국인 지분이 증가한 기업은 시장 가치가 상승하고 펀더멘털이 개선된 반면 기업에 부담을 줄 정도의 배당압력이나 투자위축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제 일선에서 느끼는 외국자본의 위협이 대단히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주주행동주의의 국내외 비교와 정책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국계 사모펀드를 중심으로 '약탈형 주주행동주의'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정,재계나 시민단체 모두 외국 투기자본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정부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1일 열린 토론회 모습.
정,재계나 시민단체 모두 외국 투기자본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정부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1일 열린 토론회 모습. ⓒ 민주노동당

미국·유럽, '경제 국수주의' 주장할 입장인가?

어떤 외국자본을 규제하느냐는 점에 대해서도 논쟁이 일고 있다. 이미 자본에 '국경'은 사라졌고, 국내로 들어오는 모든 해외자본을 막을 수는 없는 상태다. 때문에 투기자본감시센터 등은 단기간에 이익을 내고 빠지려는 '투기자본'을 가려내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한국금융연구원 정한영 연구위원은 "외국자본은 사전적으로 건전한 외국자본과 투기적 외국자본을 구분하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반면 이정원 투기자본감시센터 운영위원장은 "론스타, 칼라일 등 IMF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해외자본은 대부분 투기자본"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의 핵심은 역시 세 번째 주제다. 외국자본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할 것인가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사실상 이번 논쟁은 한국 정부가 제시한 외국자본 규제 방식에 대해 해외 언론이 '경제 국수주의'로 맹비난한데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금감위가 발표한 '5%룰 개정'을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윤증현 금감위원장이 언급한 '외국인 이사수 및 거주지 제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유럽연합(EU) 역시 외국인 이사수 제한이 WTO협약 위반이라며 제소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유럽이나 미국은 외국자본에 관해 대단히 배타적인 정책을 갖고 있다. 한국을 '경제 국수주의'로 몰아세울 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에게 국가안보 차원에서 외국인 투자를 조사하고 투자를 철회할 수 있는 권한(Exon-Florio)을 부여하고 있다. 프랑스도 '화폐재정법'에 따라 국가 안보, 공공질서 등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는 사전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영국은 '공정무역법'에서 외국자본이 공공이익에 반할 경우 투자를 막거나 철회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총리에게 주고 있다.

민주노동당 등은 이런 사례를 근거로 한국도 외국자본의 수탈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5%룰'이나 '외국인 이사수 제한'으로는 규제가 약하다는 것이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11일 토론회에서 ▲전략산업의 소유 제한 ▲사전심사 강화·철수명령제 도입 ▲조세조약 개정 등을 주장했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역시 "국내에서 은행업을 하려는 외국인 대주주는 국내에 등기시켜 조세회피 시도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의 국적을 묻지 말라"는 한국 정부

한덕수 부총리는 외국자본의 국부유출 논란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거듭 밝히고 있다.
한덕수 부총리는 외국자본의 국부유출 논란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거듭 밝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러나 이처럼 논쟁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번져가도 정부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12일 "외국 자본이 정당한 영업활동을 통해 시장질서를 지키며 배당을 많이 받는 것 등에 대해 국부유출론 등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해외 언론의 비난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외국자본 규제에 의욕을 보였던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도 안팎의 비판에 의지가 한풀 꺾였다. 때문에 윤 위원장이 제안한 '외국인 이사수 제한' 정책도 끝내 흐지부지 된 상태다.

한 부총리나 윤 위원장 등 정책 담당자들이 되풀이하는 말은 단 두가지 뿐이다. "자본에 국적을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과 "국내외 자본을 막론하고 불법 행위는 엄정히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도 나름대로의 대책은 세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외국자본에 대항할 만한 토종자본을 육성하겠다는 얘기다. 정부는 곧 시장에 풀리게 될 수백조원의 연기금과 국내 사모펀드를 믿는 눈치다. 또 국내 기업의 '역차별'을 해소하겠다는 말도 공공연히 흘러나온다. 이는 곧 재벌에 대한 규제를 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장 민주노동당 등은 "외국자본 규제는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며 "국내 재벌로 하여금 외국자본에 대항하게 하려는 정책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한편 현재 국회에는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를 담은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 2건과 '은행법 개정안' 1건이 계류중이다. 김종률(열린우리당) 의원 외 16명이 발의한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은 외국인이 국가 기간산업을 인수하려면 산자부장관의 승인을 얻도록 한 것이 골자다. 같은 당 배기선 의원 외 29명이 제출한 개정안 역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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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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