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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생전 사진
ⓒ 기념사업회 제공
"청산리 전투에서 왜군과 싸운 이름 없는 전사들을 찾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항일무장투쟁 운동 중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린 대첩의 하나로 항일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를 이끈 김좌진 장군과 개인 회고록을 남긴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참전용사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실제 만주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왜군과 대적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던 무명의 무장 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 청산리 전투에서 참전한 무명의 전사들을 재조명하는 운동이 부산에서 펼쳐져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17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좌동 장산 기슭에 위치한 '모정원-이정희의 농장'에서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의 기념사업회 창립식'이 열렸다.

강근호(1893~1960) 선생은 함경남도 정평군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 만주에서 활동한 항일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에서 보병 1중대장으로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10차례의 전투에 참전한 독립투사다.

그는 해방 후 고국으로 귀국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으며 6·25 전쟁 때 대구에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이정희(73) 여사를 만나 1953년 결혼했다. 그 후 1956년 5월 중령으로 전역한 뒤 1960년 2월 24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 1가에서 작고했다.

현재 그의 주검은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으며,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처럼 강 선생의 조국광복 투쟁은 2002년 전기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이 출간됨으로써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 지난 17일 낮12시 부산 해운대구 좌동 장산 모정원에서 애국지사 김영찬 선생을 비롯한 해운대 구청장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 발족식'이 열렸다.
ⓒ 기념사업회 제공
생전 유언따라 청산리 전투 무명의 참전용사들 찾기 나서

강근호 선생은 생전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입버릇처럼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하여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에는 청산리 전적비가 몇 곳에 건립된 바가 있었고 만주 청산리 현지에도 초라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으나 실상 전투의 주역인 무명의 전사들을 위한 추모비는 건립된 적이 없었다.

이에 기념사업회 측은 45년이 지난 지금 선생의 유언에 따라 해운대 장산에 강근호 선생 기념관과 함께 무명의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돌비석에 새겨 넣을 계획이다.

기념사업회 측은 실제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던 650여명 가운데 이름이 확인된 독립투사 100여명 이외에도 잊혀진 참전자 찾기 운동을 계속 펼쳐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기념사업회 이용득 감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강근호 선생의 부인 이정희 여사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과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증손녀로 6·25전쟁 당시 최초의 여자 학도의용군으로 국군 제 1군단 심리정보요원으로 참전한 여장부"라고 전했다.

또한 이씨는 "최근까지 이정희 여사가 혼자 사는 모정원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등 정부와 우리 사회가 그동안 항일 독립투사와 유가족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너무 부족한 것 같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덧붙이기도 했다.

앞으로 기념사업회측은 청산리 전투의 이름없는 참전자 찾기와 함께 한국무장독립운동 사료수집과 보급, 학술교양강좌 '장산 아카데미' 개설 등 청산리 전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무명전사들을 재조명할 계획이다.

덧붙이는 글 |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051-703-4553)에서는 1920년 10월 청산리 전역에서 총을 들고 직접 왜군과 싸운 참전주역인 '이름없는 전사들'의 후손을 찾고 있습니다. 이 분들을 찾아 추모비 후면에 그 이름을 새기고자 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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