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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벌개요.” 1937년 6월4일 보천보 전투 당시 옆마을에 살았다는 강순명 옹의 증언이다. 그는 총격전이 1시간가량 계속 됐다고 말한다. 보천보 전투는 항일 빨치산들이 자주 출현해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다는 혜산진 인근 면 소재지인 보천보에 김일성 항일유격대가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 관공서를 기습, 일경 6명을 사살하고 7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작은 전투였지만 정치적 충격은 매우 컸다”고 평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2002년 2월3일 방송) 보천보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힌 것이다.

불의의 기습으로 일격을 당한 일제는 보천보 전투 뒤, 마에다 부대를 보내 뒤쫓지만 홍기하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에게 또 다시 섬멸 당한다. 홍기하 전투 현장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일본 측 사망자가 120명이라고 적혀있다. 이때는 “만주 방면 독립군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0년 3월의 일이다.(위 방송)

김일성 부대에 대한 기록은 미국측 기록에도 언급된다. 1945년 “국무부 최고의 한국 전문가”인 조지 매큔은 1937년 소련 저널에 실린 글에 관심을 가지고 번역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위대하고 유능한 지도자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김-니-첸(김일성) 부대가 특히 두드러졌다. 그의 부대원들은 정말 용감하다. 가장 위험한 작전은 모두 그 부대가 도맡아 처리한다. …일본인들은 김-니-첸을 체포하기 위해 1년째 추격하고 있으나 아직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브루스 커밍스 저 <김정일 코드> 39쪽, 남성욱 역)

지난 4월11일 강만길 광복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의 “김일성 전 주석은 독립운동가”라는 발언이 있은 후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이 크게 반발하며 케케묵은 논란이 다시 불거지긴 했지만, 한때 맹위를 떨치던 ‘김일성 가짜설’은 이미 설 자리를 잃고 수구세력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듯하다.

김일성 항일유격대의 보천보 전투를 비롯한 주요 항일전투들도 주류역사학계에서 크게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다. 강만길 위원장 또한 평생을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바쳐온 석학이니 말이다.

반면 김일성 부대는 존재했고, 보천보 전투 등 30년대 주요 전투는 사실이지만, 중국 항일연군 소속으로 중국군의 통제를 받는 작은 부대의 지휘자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일제가 만주지역에 주둔군의 규모를 대폭 늘리며 항일무장부대에 대한 발악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1941년 이후부터 김일성 부대는 일본 관동군에 소련-만주 국경까지 쫓기다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피신한 후 45년 2차 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잠수’하다 해방과 함께 소련의 ‘꼭두각시’로 등장해 권력을 장악했다는 주장도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당시 간도지역 공산주의 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조선인이 이끌어 가고 있었다. 간도지방 중국공산당 직접 행동원의 비율이 1931년 2월 총 570명 중 조선인이 520명을 차지했고 1933년 말의 자료에서는 공산당, 공청, 공산소년단, 반일회, 유격대 등을 모두 합친 총 1만 6381명 중 조선인이 1만 5725명으로 압도적 비율을 점하고 있었다.(이정식, 스칼라피노 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226쪽, 이찬행 저 <힘찬 우리 역사1> 43쪽에서 재인용)

“이 점은 김일성이 가짜는 아니지만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그들의 지도하에 움직인 소부대의 지휘자’일 뿐이라고 그의 지위나 의미를 축소시키는 주장과도 거리가 있다.”(위 책 44쪽)

또 다른 자료를 보자. 한국전쟁 당시 게릴라식 습격으로 고민하던 미군은 일본의 “게릴라 소탕작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중 관동군에서 대좌로 근무한 두 사람이 만주에서 김일성 부대를 추격한 적이 있어 미군들에게 브리핑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여타 조선 게릴라들은 중국의 지휘자들과 협조체계를 구축했으나, 영향력 있는 특정인의 지시에 복종하지는 않았다며 “(김일성이) 소련군 또는 중국 공산군 지휘부와의 관계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보고했다.(커밍스 위 책 40쪽)

보고에 의하면, 게릴라들은 진압작전을 피하기 위해 소련의 국경선을 수차례 넘나들었으나, 소련은 그들에게 무기나 물질적인 원조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무기와 탄약 그리고 다른 군수품들을 탈취해 사용했다.(위 책 40쪽)

소련에서 ‘잠수’하다 해방 직후 ‘꼭두각시’로 등장했다는 의견에 대한 반박이다. 이 의견에 의하면 김일성은 “소련의 손에 의해 선출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소련인들은 수개월 동안 그를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부하로 여겼으며, 조만식이 이끄는 임시정부 하에서 국방을 맡기로 돼 있었다.(위 책 49쪽)

소련을 등에 업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을 결정적으로 도왔다는 지적도 있다. 1930년 후반 이후 소련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의 북진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소련이 항일 게릴라 단체에 대해 실질적인 원조를 제공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으나”, 게릴라 부대는 일본이 북진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선봉’에 섰다.(위 책 44쪽)

더 나아가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태평양 전쟁>이라는 책을 통해 “제국군대가 만주에서 게릴라 수렁에 빠진 것이 1931년부터 유래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치른 최장기간의 전투였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커밍스는 이와 관련해 (항일 게릴라 부대의 활약이) 일본이 중국본토 장악을 포기하고 남진을 결심하게 된 본질적 요인이었고, 진주만 공격도 이러한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제시한다.(위 책 44쪽)

커밍스는 또한 “소련의 전쟁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게릴라들이 일본의 북진을 막아준 데 이어, 소련이 멸망할 수도 있었던 1941년 전투-서부로부터의 히틀러의 침공과 동부로부터의 도조(히데키)의 침공-과정에서 일조했다고 믿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위 책 47쪽)

이제 41년 이후 ‘잠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북한 측 자료는 국내에서 김일성 부대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1940년대 들어와 자취를 감춘 것은 김일성 부대의 활동이 ‘조선인민에게 주는 정치적 영향을 두려워한 일제의 보도금지 조치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전까지 김일성 부대에 관련된 사실을 대서특필해왔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40년 8월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주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김준엽, 김창순 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5> 69쪽, 박세길 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 30쪽에서 재인용)

한편 북한 연구가 이찬행에 따르면,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항일 무장세력에 대해 발악적 공세를 가하자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김일성 부대)의 역량을 보존, 축적하면서 그들을 유능한 정치 군사 간부로 육성하는 방침을 세우고 대부대 활동을 중지”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부대와 정치공작소조 등으로 편성된 뒤 소련-만주 국경을 넘나들며 대중 정치사업과 대일 정찰활동 등을 계속적으로 수행”했다고 지적한다.(이찬행 위 책 54쪽)

이와 관련 역량 보존, 축적과 소부대 활동으로의 전환 이유에 대해 북한 측 자료는 “김일성이 나름대로 다가오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역량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소부대 활동과 정치사업에 치중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박세길 위 책 30쪽)

40년 이후 활동에 대한 견해는 또 있다. 커밍스는 “그 당시 김일성을 잘 알고 있던 소련인의 말에 따르면…그의 부대원들은 빈번하게 경계선을 넘어 기습을 가했다”고 적고 있다.(커밍스 위 책 49쪽)

일제 패망 직전이었던 1944년 11월말경의 일제의 한 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현재 김일성은 만주에서 활동할 게릴라들을 바쁘게 훈련시키면서 블라디보스톡 부근의 오간스카야 야전학교에 있다. 최근에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미국 공군의 공습과 때를 맞추어 철도를 파괴하기 위하여 한(조선)-만(주) 국경의 요충지에 파견할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브루스 커밍스 저 <한국전쟁의 기원> 85쪽, 김주환 역, 박세길 위 책에서 재인용)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일본 경찰들의 기밀문서들은 김일성이 1945년 8월에 소련으로부터 ‘해방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격해 올 예정이라는 정보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김정원 저 <분단한국사> 112쪽, 박세길 위 책에서 재인용)

제한된 자료만으로 ‘김일성 부대의 여러 논란’을 입체적으로 해부하고 진위여부를 완전히 파헤치기란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강만길 위원장의 ‘김일성 항일투쟁’ 언급으로 촉발됐던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 등의 ‘논란 부추기기’가 과거와는 다르게 ‘색깔논쟁’으로 불붙지 않고 큰 탄력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광복 60주년이 새롭게 다가온다는 의견도 들린다. 김일성 부대와 관련된 이견만이 아니라 현대사 전반에 대한 역사학계와 연구가들의 진일보한 성과를 기대한다는 대중들의 목소리가 광복 60돌을 앞두고 점차 높아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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