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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탕국. 쌉싸름하고 알싸하고 상큼한 봄의 내음이 입 안에 가득하다
애탕국. 쌉싸름하고 알싸하고 상큼한 봄의 내음이 입 안에 가득하다 ⓒ 김선정
작년 여름, 일주일만에 시골에 가 보면 밭은 온통 쑥 천지였다. 우리 부부는 쑥을 뽑다 말고 밭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쑥쑥 잘 자란다고 이름이 쑥인가?"
"그러게 말이야. 이건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네."

그래도 봄에는 냉이보다 먼저 양지 쪽에 돋아 나와 우리 입을 즐겁게 해주던 쑥이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산마루의 잔설을 배경 삼아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쑥들이 뾰족하게 나와 있다. 쑥 튀김도 해 먹고, 쑥 부침도 좀 하고, 쑥국도 끓여 먹고, 쑥떡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이리저리 찾아 본다. 작년에 옥수수를 심었던 밭에 유독 쑥이 많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찬바람 속에 싹틔운 녀석들, 지금은 이렇게 예쁜데 몇 달만 지나면 또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겠지. 황사가 지나가는 봄날, 흐린 하늘 아래 바람 끝은 매운데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들도록 쑥을 뜯는다.

단오 전까지는 쑥을 먹었다던 어머님.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끓여 주시던 쑥국은 소박했다. 맹물에 된장을 조금만 풀고 국물이 끓으면 콩가루 입힌 쑥을 듬뿍 넣어 오직 쑥 본연의 맛에 충실한 국을 끓여 주셨다. 어머님의 음식은 늘 그랬다. 화려한 색도, 특별한 양념도 없지만, 재료 자체의 맛이 살아 있어 시간이 갈수록 자꾸 생각나게 했다.

산수유 꽃 아래서 쑥을 캐다. 쑥과 함께 봄도 캐다.
산수유 꽃 아래서 쑥을 캐다. 쑥과 함께 봄도 캐다. ⓒ 김선정
쑥으로 만들어 먹을 음식 생각하느라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나 보다. 남편은 어느새 사온 묘목을 다 심고,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는 내 쪽으로 건너온다.

"저녁밥은 언제 하려고 쑥만 뜯고 있어?"
"그러게요. 뜯다 보니 자꾸 욕심이 나네. 참, 엄마도 좀 갖다 드리면 좋겠다."

요즘 들어 속이 잘 내리지 않는다시던 친정 엄마 생각이 이제야 난 것이다.

"밥도 조금씩만 드신다면서? 아예 가서 소화 잘되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지 그래."

남편 말대로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도 하고 엄마께 맛있는 쑥국, 아니 애탕국도 맛보시게 해야겠다. 엄마한테 간다고 하니 갑자기 없던 힘이 솟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친정, 친정 엄마 소리에 가슴이 찡해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세상 모든 딸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일 것이리라.

그런데 나처럼 엄마한테 무심한 딸이 또 있을까? 최씨 집안에 시집 온 후로 나는 엄마의 딸이라는 이름을 잊고 살았다. 오로지 어느 집 며느리, 누군가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서 살아온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 엄마가 계시는데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애탕국의 재료. 데친 쑥, 다진 고기, 깨, 마늘, 파, 계란... 봄이 온통 섞여 있는 것 같은 재료들.
애탕국의 재료. 데친 쑥, 다진 고기, 깨, 마늘, 파, 계란... 봄이 온통 섞여 있는 것 같은 재료들. ⓒ 김선정
자주는 커녕, 일 년이면 대여섯 번이나 될까? 물론 구차한 변명이 되겠지만, 큰 일이 유독 많은 시집살이(나는 큰 집의 맏며느리이자 외며느리다)를 하느라, 또 워낙 엄마한테 잘하는 큰 새언니와 큰오빠인지라 믿거라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가끔 친정에 가보면 엄마는 몸에 좋다는 각종 약을 구비해 놓고 드시곤 했다. 문 밖 출입도 잘 못하시는데, 새언니와 오빠는 철따라 옷이며, 신발, 가방 같은 것들을 새로 장만해 드리다 엄마의 걱정을 들었다.

나는 딸 노릇 한 번 제대로 해볼 새도 없었는데 엄마는 벌써 팔십이 넘으셨다. 막내로 태어나 엄마의 사랑도 제일 많이 받았는데, 일찌감치 결혼해서 시집에 충성(?)하느라 세월이 다 가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딸이 좋다고, 아들보다는 딸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 같은 딸은 그런 말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캔 쑥을 깨끗하게 씻어 데쳐야 한다.
캔 쑥을 깨끗하게 씻어 데쳐야 한다. ⓒ 김선정
늦은 저녁을 지어 먹고, 친정 엄마께 전화를 했다. 쑥 뜯어서 간다니까 대뜸 화부터 내신다. 힘들게 그건 왜 뜯느냐고, 아버님 해 드리고 최 서방이랑 애들이나 해먹이란다. 엄마는 언제나 이러신다. 너 살림하기도 바쁠텐데 친정 올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편안히 잘 있으니 걱정 말고 그저 시댁 식구들한테 잘해라.

엄마에게 딸이란 존재는 어떤 것일까? 나이가 차면 꼭 시집을 보내야 하고, 시집간 딸은 그저 탈 없이 살아 주기만을 바라며 멀리서 기도하는 엄마. 딸이 없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요즘에는 친정 엄마 모시고 사는 집들도 꽤 있다는데, 우리 엄마는 내 결혼 생활 20년 동안 꼭 네번 우리 집에 오셨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사위 생일에 바리바리 음식 싸들고 한 번, 큰애 돌 때, 작은애 낳았을 때, 마지막으로 집 짓고 이사했을 때. 아무리 시부모님 모시고 사는 딸네 집이라 해도 엄마는 좀 너무했다.

재료들을 치대 반죽을 한다. 음식은 역시 손맛이다.
재료들을 치대 반죽을 한다. 음식은 역시 손맛이다. ⓒ 김선정
우리 가정에 바라는 것은 더 소박하다. 돈 많이 벌어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사위가 출세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내 딸이 시집 식구 눈 밖에 나지 않기를 바라고, 사위는 오로지 내 딸만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걸 보면 역시 우리 엄마는 옛날 사람인 것 같다.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장모님이 옛날 분이신 걸 이제 알았냐고 한다. 일제 강점기 지나, 대동아전쟁(엄마 말대로 하면) 겪어, 해방도 보고, 6·25사변 때 피난 다녀, 정권 바뀔 때마다 겪어 온 세월이 또 얼마인가?

엄마는 지난해 83세 생일을 맞으면서 큰 오빠 내외의 권유로 작은 책을 쓰셨다. 살아오신 세월, 지나가 버린 일생을 그저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엄마의 글에서 나는 또 양념이나 조미료 없는 담백한 맛을 느낀다.

시어머님의 음식이나 친정 엄마의 글이 소박하지만 왠지 끌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 그 속에 그 분들만이 겪었던 특별한 추억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가 아이들에게 만들어준 음식에는 어떤 기억을 버무려 넣었을까? 내 아이들도 나처럼 엄마를 추억할 만한 음식 하나, 특별한 기억 하나 가지고 있을까?

치댄 재료로 경단을 만든다. 동그랗게 빚으면 봄빛도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기는 것 같다.
치댄 재료로 경단을 만든다. 동그랗게 빚으면 봄빛도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기는 것 같다. ⓒ 김선정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애탕국. 춘궁기의 소중한 먹거리였던 쑥이 이제는 별미가 되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애탕국. 춘궁기의 소중한 먹거리였던 쑥이 이제는 별미가 되었다. ⓒ 김선정
봄, 우리 밭의 첫 손님 쑥을 친정으로 들고가, 집안에만 갇혀계신 친정 엄마께도 봄맛을 보여드리며, 비로소 딸 노릇 하나를 했다는 위안을 삼는다.

봄이 진하게 우러나온 쑥국, 그것은 시어머님을 기억하는 내 추억이기도 하고, 친정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맛이기도 하다.

애탕국 끓이는 법

1 어린 쑥을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쳐 낸다.
2 쇠고기를 살코기로만 곱게 갈아 마늘, 파, 참기름, 소금, 계란 흰자를 넣고, 데쳐 놓은 쑥도 넣고 치댄다.
3 끈기가 생기면 동그랗게 뭉친 후 밀가루나 녹말가루를 묻혀 놓는다.
4 멸치 국물을 만들어 국물이 팔팔 끓을 때 만들어 놓은 경단을 넣고 익힌다.
5 다 끓으면 송송 썬 파를 넣어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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