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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꽃 앞에 서신 우리 어머니
ⓒ 이임숙
엄마의 고향은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 수수내입니다. 서당 훈장을 하시다가 방랑 시인의 길에 나선 외할아버지의 한 점 혈육이신 우리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딸은 팔자도 사납다더니…"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만큼 어머니의 생애가 고달팠던 게지요.

서당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태어나신 이듬해 어느 날 어떤 부름을 받은 사람처럼 훌훌 털고 방랑길을 떠나셨답니다. 일제시대라는 시절을 탓하시느라 그러셨던지 외할아버지는 방랑 중에 시를 쓰시며 낚시로 세월을 낚으신다는 소문만 간간이 고향에 보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그 모양새를 괘씸하게 여긴 집안사람 중 누군가가 아직 젊은 외할머니를 이웃 사람에게 중매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답니다. 어머니가 열 살 되던 무렵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당숙의 집에서 자라다가 6·25전쟁으로 부산 생활을 시작하신 우리 어머니는 소문으로, 낚시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소식을 들으셨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제복 입은 사람이 멋있더니라."
직업군인을 선망하시던 어머니의 눈에 15살이나 나이가 많은 아버지가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용모가 수려하고 제복을 입고 계신 아버지의 젊었을 때 사진은 지금 내가 봐도 멋있습니다.

사회를 모르는 아버지는 용해 빠졌다는 소리만 들을 정도로 무골호인입니다. 사회물정도 모르고 제대를 하신 아버지는 상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상 공장을 차렸지만 장사꾼들에게 휘둘려 일찍 사업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 후 아직 어린 4남매 먹여 살릴 길이 없어 어머니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나가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체구도 작은 어머니가 이고 다니시던 짐의 무게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너는 절대로 나이 차이 많은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여자가 고생이다. 무남독녀 외딸은 팔자도 사납다더니 이놈의 팔자 한번 기구하다."

어머니가 해 보지 않은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취로사업이라고 일을 한 만큼 밀가루를 얻어오는 일에서부터 공사장일까지 손의 지문이 다 닳도록, 손마디가 굵어져 반지가 안 들어 갈 정도로 심한 노동의 세월을 사셨습니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아버지는 여자는 공부를 안 시킨다는 주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맏딸인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을 시키셨습니다. 그래도 우리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들인 두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도록 날마다 끼니 잇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미안하다, 숙아,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엄마가 이제 담북장을 만들어서 팔면 동생들 공부는 시킬 수 있을 거다."

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안쓰러워하시면서 언제나 신세타령을 하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살 길을 찾으셨다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고입검정고시를 치르고 합격한 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듬해에 저는 방직공장에서 문을 연 산업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몸은 고달파도 청국장 일을 시작하니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어렵게 다니던 제가 제1회 전국 청소년 노동문화제에서 시 부문 특선을 차지하고 청와대까지 다녀왔다는 소식에 잔치라도 해야겠다며 기뻐하셨지만 나는 우리집 곳곳에 밴 청국장 냄새가 영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우리집에 오려고 하면 그런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청국장을 이고 배달을 나가시는 어머니가 걱정돼 따라 나서려고 하면 어머니는 따라오지 말라며 사나운 말로 쏘아붙이곤 하셨습니다.

"이것아, 너는 에미가 부끄럽지도 않니? 저만큼 떨어져서 와라."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정말로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지만 그 청국장 냄새만큼은 정말로 부끄러웠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는 하나도 안 부끄러운데 이 냄새는 좀 그래요."

나는 특기장학생이 되어 대학엘 갔고 동생들도 제 밥벌이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어머니는 그 냄새나는 청국장사업(?)을 놓지 않으려 하십니다. 저는 중풍으로 쓰러지신 아버지 병 수발도 막내 동생에게 맡기고 기를 쓰며 청국장에 매달리시는 엄마의 모습이 정말로 야속했습니다.

엄마가 청국장을 만드느라 분주할 때면 콩 삶는 마당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당신의 외로운 말벗이 되어달라고 옆에 있어만 달라고 소리 지르시는 아버지를 왜 애써 피하셨을까요? 아버지는 풍을 맞으신 지 4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 다 출가시키신 연후인 지금도 어머니는 청국장을 만드십니다. 어려운 시절이 한이 되신 어머니께서 먼 친척 할머니 되시는 분과 함께 제 자취집에 오셨을 때 여쭈어 보았습니다.

"엄마, 엄마는 어떤 때가 제일 기분이 좋아요?"
"돈 벌어서 돈 세고 있을 때가 제일 기분이 좋지."
"할머니, 할머니는 어느 때가 제일 기분이 좋으세요?"
"나는 목욕하고 깨끗한 옷 갈아입을 때가 제일 좋다."

나는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사는 일이 고단하셨기에 저리도 힘겨운 말씀만 하시는 것일까?' 그런 어머니께서 올 4월 마지막 주에 71세의 생신을 맞으셨습니다.

"엄마, <오마이뉴스>에서 부모님 자서전 대필 원고 모집이 있는데 엄마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
"그래라, 그래라. 나 혼자 무남독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피를 나눈 네 이모도 찾았다. 너도 한 번 이모 얼굴이라도 보아야 할 텐데…."

"어떻게요? 엄마에게 동생이라도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외할머니가 동생을 가진 채로 재혼하셨던 모양이야. 그 집에서도 다 알고 이해해 주었고, 엄마 어린 시절에 새 아버지에게 옷도 얻어 입곤 했는데 친동생이 있는 것까지는 몰랐구나. 그런데 부여 외가 잔치에 갔다가 알게 되었단다. 엄마에게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동생들도 많다. 엄마 팔자가 사나운 것만은 아닌 모양이지?"

"아이구 엄마도 참, 엄마, 제발 이제 청국장 만드는 일은 이제 그만 두세요. 엄마 연세가 몇인데 이제 편하게 사실 때도 되었잖아요? 집에만 오면 이 냄새는 정말 싫어!"
"어떻게 이 일에서 손을 놓는단 말이니? 나 죽도록 이 일에서는 손을 안 놓을란다. 우리 끼니를 잇게 해 준 이 일을 어떻게 놓겠니? 엄마가 힘들지 않을 때까지 동무 삼아 끝까지 해보고 싶구나."

지금도 우리 어머니는 자식에게 용돈을 얻어 쓰시지 않습니다. 어쩌다 용돈을 드리면 그 돈을 다 손주들 손에 덤까지 얹어서 돌려주십니다. 그 고약한 청국장 냄새도 어느덧 저에게까지 정이들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신 어머니의 고집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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