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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표지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표지 ⓒ 민음사
"도처에서 사람들은 상실한 기능들 또는 잃어버린 신체, 잃어버린 사회성, 잃어버린 입맛을 재교육한다.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단 말인가. 그런 게 존재하기나 했었나?"(42쪽)

매체가 점점 깊이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면서, 전통적인 관계와 소통들이 새로운 지평에 들어섰음을 이미 상황주의자들은 간파했다. 그러나 상황주의자들이 삶에 대한 매체의 개입을 '왜곡'이라고 여기며 과거의 '진정성'을 회복하기를 촉구했다면, 지금부터 소개할 한 냉소주의자는 오늘날의 이러한 변화에 별다른 가치 판단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진정성'마저도 의문에 부치고 있으니 말이다.

1. '시뮬라크르'들의 자전

'진정성'과 '거짓'이라는 구분은 사실 전형적인 '재현' 체계의 사고방식이다. 재현 체계에서는 가치와 권위를 쥐고 있는 '진실'의 영역이 있고, 그를 모방하는 '가짜'들의 영역이 있었다. 그리고 '가짜'의 가치는 '진실'을 얼마나 유사하게 모방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것은 플라톤 이래 서구 사유의 전통이기도 했다. 예컨대 플라톤에게 존재의 서열을 매기는 기준은 무엇이 '이데아'와 가장 닮았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전통 역시 인간이 '진실'인 신의 형상을 본뜨고 있으므로 가장 가치있는 존재라는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기준이 되는 '진실'의 이름은 '이데아'에서 '절대자', '남근', '효율성' 등으로 업데이트 되어 왔지만 서구 사유 전통에서 '재현' 체계의 지배권은 완고했다.

<시뮬라시옹>은 이러한 '재현' 체계의 붕괴로서 오늘날의 사회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이미지는 처음에는 "실재의 반영"으로 출발했지만, 언젠가부터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더니 "실재의 부재"를 감췄는가 하면 이제 "어떤 실재와도 무관"함을 선언해버리고 자기 자신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순수한 "시뮬라크르"들의 세계를 구축해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복제 기술의 발달이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흐리고 원본의 전통적인 권위인 '아우라'를 박탈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했었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은 벤야민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그의 복제물들은 실재의 권위를 박탈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재를 살해한다. 가상현실과 입체영상의 예에서 보듯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들이 판치고 있는 현실에서, 실재를 참조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복제물들은 실재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드디어는 '누구를' 닮았느냐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 자기 자신들끼리의 모방에 의해, 원래는 실재의 모방이었던 이미지는 서로 얽히고 얽힌 '시뮬라크르'들로 전화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형인데 실재를 모방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들의 전략이면서 실재의 죽음 뒤에서 파생실재만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를 진단하는 기술적 개념이기도 하다.

“위법, 폭력은 덜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실재의 분배만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시뮬라시옹은 무한히 훨씬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시뮬라시옹은 항상 자기 대상을 넘어서서, 질서와 법 그 자체가 단순히 시뮬라시옹일 따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하도록 한다.” (54쪽)


2. 실재의 죽음을 은폐하는 '저지' 기제

많은 지식인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던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발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는 미디어를 통해 걸프전의 미사일 발사장면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의 참혹한 모습은 없었다.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죄책감도 없었다. 미디어 속의 걸프전의 이미지가 실재를 은폐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실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보드리야르 식으로 이야기하면 걸프전은 사실 세계가 참혹한 전쟁 속에 있음을 은폐하기 위해 거기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는 다른 평화로운 '실재' 세계에 살고 있음을 믿게 하기 위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걸프전은 실재의 틈입이 체계를 붕괴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대표적인 '저지' 기제였다.

저지 기계는 실재가 지워져버린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직도 의미가 존재한다는 걸 믿게끔 하기 위해, 아니면 실재의 비의미가 체계를 붕괴시키는 걸 막기 위해 체계가 부리는 책략이다.

그에 따르면 '포르노그라피'는, '디즈니랜드'는, '스캔들'은 세계의 본질이 '유혹'이며, '거짓'이고, '부정'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하는 '저지' 기제다. 어딘가에 '도덕'이, '진실'이, '청렴'이 있을거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3. '함열'의 시대

더 이상 기준이 될 원본이 없는 시뮬라크르들의 무한 복제는 무수한 '차이'들을 생산해낸다. 구조주의 언어이론에 따르면 '의미'는 체계 속에서 기호들의 '차이'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의미를 생산해내는 차이가 '포화'에 이른 사회이다.

가령 수신자들이 해독도 하기 전에 매체들이 무수하게 쏟아내는 정보들은 더 이상 다른 것과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더 이상 이들은 의미를 가지기 위한 것들도 사회적인 것도 아니다. 차라리 "비의미적이며 무가치하다."

"매체들은 사회화의 수행자들이 아니라, 정반대로 대중들 속에서 사회적인 것을 빨아들여 없애버리는 자이다.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공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분석해야 한다. 이 공식의 의미는, 의미적인 모든 내용물은 매체의 유일 지배적인 형태 속으로 흡수된다는 것이다.” (147쪽)


너무 많은 차이가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을 때, 가능한 것은 동일자들의 무한증식일 뿐이다. 과거 의미를 만들어냈던 전통적인 극점들은 붕괴된다. '진실'과 '허위', '원인'과 '결과', '질서'와 '위반'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극과 극이 하나로 모이는 '함열'의 시기가 온 것이다.

어떤 중심을 가지고 진보하거나, 영역을 넓히는 따위의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일정 높이에 이른 발사물이 중력에 의해 다시 추락하는 것처럼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세계는 발전과 팽창을 멈추고 수축하는 시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의미와 경계의 미분화 상태로 다시 떨어질 것이다.

과거의 무기 경쟁이 넘치는 에너지를 과시하는 '팽창'의 시기를 상징한다면 오늘날의 핵무기는 너무나 커다란 자신의 에너지 때문에 자신의 사용을 '저지' 당하고 있다. 이는 '수축'과 '함열'의 시기에 대한 상징이다.

4. 역사의 죽음

이렇게 근대의 진보적 역사관과 재현 체계, 전통적인 의미 개념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보드리야르에게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통적인 좌파의 저항이 실재가 아직도 존재함을 주장하고픈 체계의 전략에 봉사할 뿐이라는 보드리야르. 근대의 나약함을 버리라고 충고하는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가지지 않는 '도전'과 '상상'만이 체계에 저항할 유일한 방도다. 그러나 냉소와 허무주의로 점철된 그의 에세이에서는 이 역시 모호해서 그것은 어떤 때에는 대중의 무기력한 순응과 구분조차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는 지나친 결과주의자이다. 전통적인 좌파의 저항이 결국 체계에 포섭되거나 매체의 전략의 일부로 전락했더라도 그 간에 벌어지는 투쟁의 과정과 작은 성취들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체 게바라나 커트 코베인이 오늘날 상품 사회의 아이콘이 됐다고 해서 과거의 그들이 무가치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모든 것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에서 반드시 '무의미'를 이끌어낼 필요는 없다.

물론 모든 사유가 전통적인 의미의 실천적 전략들을 도출해낼 의무 역시도 없을지 모른다. 또한 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역시 근대적 총체성의 유물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그의 의미는 이미 충분하다. 예전의 사유 방식으로 세계를 해독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지금,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눈으로써 그의 사유는 분명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니까.

덧붙이는 글 | <시뮬라시옹>의 특징처럼 시작도 끝도 논거도 불분명한 문체들이 예시만을 바꿔가며 자전하는 기이함에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니 주의할 것.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민음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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