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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게는 선천성 왜소증(연골무성형증)이라는 장애가 있다. 어려서부터 난쟁이라는 소리도 듣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는 왜소증이라는 장애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으며, 가깝게 지내는 주변인들도 나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활발한 성격 덕분에 초등학교를 다닐 때 주변엔 늘 친구들이 많았다. 장애로 인해 의기소침할 거라 생각한 선생님들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장애로 인한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무슨 일인지 하나 둘씩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함께 도시락을 나누어 먹던 친구들도 나를 멀리했다. 그들에게 물어 보면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요즘 말로 ‘왕따’가 됐다. 얼마 후 친구에게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너랑 같이 밥 먹고 친하게 지내면 키 작은 병이 옮는다고 해서….”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지만 어린 마음에 그 말은 큰 충격이었다. 내 모습에 초라함을 느꼈고 그런 모습이 싫어졌다. 처음으로 열등감을 맛보았다.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딸을 앞에 두고 하신 부모님의 당부는 너무나 무거웠다.

“넌 남들보다 공부도 두 배는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 또 서서 하는 일보다는 앉아서 남들 눈에 안 띄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남들한테 무시를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진 마음을 품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진로를 고민하면서도 매서운 현실과 직면했다. 장애인이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이 사회에서는 넘어야 할 턱이 너무 높았다. 장애인이 과연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남에게서 무시 당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야 하는 길은 무엇인지 막막했다.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하고 장애인 직업 선택에 관련한 서적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무슨 과를 선택했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애써 참았다.

“장애를 고민하지 마라.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까를 고민해 보렴.”

선생님께서 열어 준 길은 바로 사회복지였다. 생소한 단어였고 어려운 말이었다.

‘어떻게 장애인이면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며 살 수 있단 말인가! 내 자신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거나 남에게 피해를 안 주면 다행이지 않을까!’

늘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만으로 자신을 보호해 왔는데 선생님이 일러 준 그 길은 이해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이정표였다. 운명의 나침판이 점차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갈 길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던 나는 점차 분명한 지향을 찾게 되었다.

‘사회복지’, 선생님이 건네신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월드비전’에서 저소득층 빈곤아동들과 함께 그들의 쉼터 노릇을 하며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고 있다.

매일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니 아이들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덩치 큰 어른들과 같이 있는 걸 봐서는 성인처럼 보이니 사람들이 나에 대해 궁금해한다. 이제는 그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월드비전의 사회복지사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동정하는 소리도 듣고, 장애인이기에 뜻하지 않게 연민의 시선과도 마주친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며 재미있고 신나게 일하고 있다. 일을 할 때면 주변의 자원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늘 힘이 되어 주고 있고, 또 아이들에게 가족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데 이는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실어 주고 그들이 꿈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가 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코흘리개 시절 도움을 받았던 친구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되어 다시금 동생들에게 형이 되어 주고 누나가 되어 주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인생에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다. 다시금 이 단체의 청지기로서 살아감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이 일의 전망이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많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얕은 생각이 아닌,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행복한 일인가에 답할 수 있는 것을 나는 꿈이라고 부르고 싶다.”
- 이원익의 <비상>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노미녀님은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전북지부 군산가정개발사업장의 상근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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