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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부흥운동을 벌였던 두릉윤성으로 오르는 길.
ⓒ 김명숙

두릉윤성.
멸망한 나라를 인정할 수 없어서 스스로 역사의 성돌이 되고자 했던 백제 사람들의 혼이 아직도 살아 있는 곳. 솔숲을 걸어, 흙길을 걸어, 아그배 꽃이 더러 피어 있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빈 성터 안에 스스로 뿌리 내린 채 성돌이 되어 지키고 있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만난다.

그때 그 사람들은 떠났어도 그들의 얘기를 누군가가 궁금해 하면 말 해주고 싶어 아직도 성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켜켜이 쌓인 천년의 세월처럼, 얽히고설킨 역사처럼 성터 안에는 수북한 낙엽들과 찔레넝쿨이 발길을 더디게 한다. 곧 꽃이 필 것이다. 백성들 눈물 같은 하얀 찔레꽃.

▲ 장방형 성돌이 남아 있는 모습.
ⓒ 김명숙

충남 청양군 목면 지곡리와 대평리, 정산면 백곡리 뒷산 꼭대기에 오래된 성터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성재라고 부른다. 동네 어른들은 “그전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러시는데 아주 옛날에 나라가 망하자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성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돌로 쌓은 성이 높아 성안에 들어오기가 어려웠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졌다”는 두릉윤성. 백제 멸망 시기이던 660년부터 663년까지 부흥운동을 벌였던 성이다. 그때 쌓았을지도 모르는 화강암으로 된 네모진 돌(장방형 석축)과 막돌들이 모여 성을 이루고 있다. 화강암이 정규군이라면 막돌들은 의기투합해 모인 민중들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받쳐주며 역사의 흔적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 막돌로 쌓은 성벽 모습, 허물어져 가고 있다.
ⓒ 김명숙

두릉윤성의 사료를 찾아보면 먼저 삼국사기 백제 지리편에 ‘두릉윤성은 웅천주(지금의 공주)에 속해 있고 두솔성 혹은 윤성이라고 나와 있으며, 대동지지 정산에 보면 본래 백제시대에 두량윤성을 두릉윤성, 두솔성, 윤성, 열기라고 한다’고 나와 있다. 두릉윤성이 속해 있는 정산면의 옛 이름은 열기현이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계봉산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200척 안에서 하나의 우물과 군창이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가 560m이고 산 정상인데도 우물터로 추정되는 곳에 물이 솟아나고 있다.

두릉윤성이 어떤 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에 유인원과 유인궤 등은 복신의 군사를 웅진 동쪽에서 격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의 책을 격파하고 많은 군사를 죽이고 포로로 하였고 군사를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태종무열왕 8년 (661년) 두양윤성에서 신라와 백제 부흥군이 한달엿새가 되도록 싸웠으나 신라는 성을 빼앗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663년 신라 문무왕이 김유신 등 28명(혹은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여 두릉윤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때 두릉윤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던 백제부흥군의 우두머리 지수신은 신라에 항복하지 않고 백제 최후의 부흥운동 격전지인 임존성(지금의 예산군 대흥면)으로 갔다.

▲ 스스로 성벽이 되어 수백년째 살고 있는 느티나무.
ⓒ 김명숙

지금 두릉윤성에는 나라의 독립을 꿈꿨던 사람들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근래까지 견고하던 성이 허물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마을사람들은 40여 년 전까지 성이 높고 튼튼해 성안에 잡나무들이 없는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성의 일부는 허물어졌어도 남문지 성문 돌이 그대로 있었다. 지금은 성문의 흔적도 없다.

“우리 새닥(새댁)적이 술 해갖고 해마다 놀러 왔는디 성이 높아서 오르지도 못하고 성 아래서 놀았어. 애들도 소풍오던 디였고. 그때는 문만 빤하고 다 막혀져 있어서 그 문으로 성안에 있는 우물에서 물 떠다가 밥 해먹고 했는디 성이 얼마나 보기 좋았다고….”(윤종필씨·78·목면 지곡리)

그 성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강물이 침수된다고 제비둑(치성천 제방-아가다리 제방이라고도 부름) 쌓는디 건설회사서 돌 한 덩이에 얼마 쳐 준다고 허니께 이 근동 사람들이 지게로 져다 팔아먹었지. 그때는 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때니께 매끈허고 디글디글 둥그러진 돌팍은 모다 져다가 팔아먹은 거지. 살기 어려운 시상을 원망허야지 누구를 원망허겄어.”(조갑형·74·목면 지곡리)

인근 사람들은 그 뒤로 돌이 필요할 때마다 성돌을 가져다 집터도 다지고 주춧돌도 세우고 축대도 쌓았다.

▲ 성안 우물터로 추정 되는 곳.
ⓒ 김명숙

맑은 물이 솟아오르던 우물터는 흙에 묻혀 혼탁한 물웅덩이처럼 변했다.

“우물터 근처를 1.8m쯤 파면 재가 많이 나오고 지금도 물이 나오고 있는 우물터를 4m 정도 내려가면 돌로 쌓은 우물흔적이 나온다.”(임두빈·59·정산면 백곡리)

백제의 부활을 꿈꿨던 두릉윤성.

이제 그 성 아래 사람들이 대신 두릉윤성의 부활을 꿈꾼다. 2년 전부터 두릉윤성보존현창회(회장 이춘호)는 1300년 전 산화한 백제 독립군들을 추모하고 성의 역사를 되새기는 두릉윤성 백제부흥군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백제군이 최후로 전사한 4월 19일, 어릴 적 소풍을 왔거나 젊은 시절 일하다 휴식하려 왔던 사람들이 두릉윤성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제향 음식을 마련하고 서로 나눠먹을 음식을 만들어 성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 성에서 내려다 본 주변 풍경. 앞쪽 산너머에 금강이 있고 강을 건너면 백제의 수도 부여다.
ⓒ 김명숙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에 어느새 파란 잎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맨땅이던 성 안에 제각각의 나무와 풀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자리 잡고 있다. 5월이 가기 전에, 찔레꽃이 지기 전에 두릉윤성에 한번 올라가 보자. 날이 맑다면 탁 트인 조망 따라 물 가둔 논에 모를 심거나 밭에 고추를 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백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역신문인 뉴스청양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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