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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엔 어느새 봄배추가 한껏 푸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영미아버지가 밭을 갈고 배추씨를 뿌린 게 엊그제 같은데 봄배추의 푸른 겉잎들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영미어머니, 정희어머니, 그리고 친정어머니, 또 나까지 이렇게 시골아줌마 넷은 봄 배추밭의 푸른 싱그러움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며 배추를 솎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배추 잎의 까실까실한 느낌이 손가락 마디마디를 간질였다. 약을 치지 않아서인지 배추 잎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건, 그 누가 구태여 말해주지 않아도 바로 무공해 봄배추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었다.
배추를 솎으면서 영미어머니는 어느새 배추찬양론자가 되어 그 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영미어머니의 배추 찬양론을 대략 요약해보면,
'봄배추는 보통 얼갈이 또는 봄 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배추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고 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장 건강에도 좋고, 또 칼슘, 칼륨 등의 무기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봄배추는 김치나 겉절이를 해먹고 쌈을 싸서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또 봄배추는 여리고 약해서 절이지 않은 상태로 까나리액젓을 넣고 다진 마늘과 생강, 다진 파들을 넣고 골고루 섞은 뒤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려야 아삭아삭한 맛을 낼 수 있다.'
우직한 농사꾼의 아내다운 실로 대단한 찬양론이었다. 더불어 어설픈 시골아줌마인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겉절이를 맛나게 하는 비법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신 영미어머니께서 마치 봄배추 겉절이를 한입 가득 맛보신 모양으로 입맛을 쩝쩝하고 다시더니 입가를 흙 묻은 손으로 쓰윽 문지르신다.
그런 영미어머니의 모습과 또 입가로 묻어나는 흙을 바라보며 배추밭 고랑에 쪼그려 앉아 시골 아줌마 넷은 한바탕 웃음잔치를 벌였다.
그때 친정어머니께서 한마디 거드셨다.
"겉절이도 좋고 또 살짝 데쳐서 된장에 조물락 조물락 무쳐 먹어도 좋지."
친정어머니의 그 말씀에 영미어머니는 뒤질세라 또 다른 요리법을 제시하셨다.
"멀겋게 푼 된장국물에 봄배추의 푸른 잎들을 손으로 뚝뚝 뜯어 넣고 된장국을 끓여봐. 거기다 청양고추 두어 개를 다져서 넣고 끓여놓으면 소고기국 부럽지 않지."
영미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주거니 받거니 하시는 봄배추 요리들은 긴 밭고랑처럼 길게 이어졌고 어느새 내 뱃속에선 허기짐의 아우성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내 김장김치로 익숙해진 우리들 입맛에 상큼한 봄배추 겉절이야 굳이 입속으로 넣어보지 않더라도 혀끝에서 살살 녹는 그 맛을 가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배추를 솎고 있던 내게 친정어머니께서 불쑥 한마디 던지신다.
"이거는 사진 안 찍나?"
언젠가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사진을 찍어대는 딸자식의 뜬금없는 취미생활을 꼬집어 하신 말씀이었다.
친정어머니의 말씀에 영미어머니는,
"사진은 왜?"
영미어머니는 못내 궁금하신지 내 얼굴로 궁금증을 가득한 호기심의 시선을 건네신다.
"아, 맞다. 사진 찍어야지. 아주머니들의 말씀에 넋이 나가 사진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
나는 벌떡 일어나 밭고랑 사이를 종종 걸음 쳐 부리나케 카메라를 가져와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배추밭을 찍고 봄배추의 싱그러움도 찍고 다음으로 영미어머니와 친정어머니와 정희어머니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여기 보세요. 예쁜 얼굴들 좀 들어주세요. 그리고 다 아시죠? 김~~치~~~"
"볼품없는 시골 아지매들은 찍어서 뭐 할 건데?"
아마도 영미어머니는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가 도무지 궁금해서 못살겠다는 표정으로 자꾸만 그 연유를 다그치신다. 그런 영미어머니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줌마. 아줌마 봄배추 솎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기사 좀 쓸려고요. 그러니 멋지게 포즈 한번 잡아 보세요."
"뭐 기사. 그럼 내가 신문에 나온다는 그 말이야?"
"글쎄요. 기사가 날지 안 날지 그거는 저도 모르지요."
"그 말은 기사가 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잠깐 기다려봐. 내 가서 준비 좀 하고 올게."
벌떡 일어서시는 영미어머니를 보고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아줌마. 됐어요. 지금도 충분히 예쁘시니까 그냥 얼굴만 좀 들어보세요."
"아이 싫어. 그럼 나중에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찍어. 이대로는 안돼. 내가 신문에 나면 그건 집안의 경산데 이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지."
끝내 영미어머니는 얼굴을 들지 않으시고 고개를 더 숙이고 계셨다.
나는 결국 봄 배추밭의 아름다운 시골 아지매들의 얼굴을 찍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미어머니는 나중에 꼭 한번 제대로 찍어 달라며 몇 번이나 부탁을 하셨다.
그 사이 봄배추 솎은 것은 저마다 가져간 그릇들에 수북하게 담겨졌고 아주머니들은 엉덩이에 묻은 흙들을 툭툭 털며 집으로들 향하셨고, 그런 아주머니들 뒤로는 푸른 봄 배추들이 봄 햇살을 받아 더욱 더 싱그럽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봄날 오후. 봄 배추밭에서 벌어진 한바탕 수다는 봄배추 겉절이만큼이나 아삭아삭한 감칠맛으로 내게 감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