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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또 뭘 해서 식구들 입을, 그리고 배를 행복하게 해주나 하는 고민으로 싱숭생숭한데 마침 앞집 영미어머니가 나를 다급하게 부른다.

"복희엄마! 밭에 봄배추 솎으러 가는데 따라가서 좀 솎아다가 겉절이 해 먹어. 그거 요즘 입맛 없을 땐 제 격이야. 어서 따라나서."

영미어머니를 뒤따르는 내 머리 속에선 어느새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봄배추 겉절이에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걸쭉한 된장찌개에 보리쌀 한 줌 넣은 보리밥에….

▲ 싱그러운 푸른색이 한창인 봄 배추밭
ⓒ 김정혜
밭엔 어느새 봄배추가 한껏 푸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영미아버지가 밭을 갈고 배추씨를 뿌린 게 엊그제 같은데 봄배추의 푸른 겉잎들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영미어머니, 정희어머니, 그리고 친정어머니, 또 나까지 이렇게 시골아줌마 넷은 봄 배추밭의 푸른 싱그러움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며 배추를 솎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배추 잎의 까실까실한 느낌이 손가락 마디마디를 간질였다. 약을 치지 않아서인지 배추 잎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건, 그 누가 구태여 말해주지 않아도 바로 무공해 봄배추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었다.

배추를 솎으면서 영미어머니는 어느새 배추찬양론자가 되어 그 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영미어머니의 배추 찬양론을 대략 요약해보면,

▲ 구멍이 숭숭 뚫린 봄 배추잎
ⓒ 김정혜
'봄배추는 보통 얼갈이 또는 봄 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배추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고 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장 건강에도 좋고, 또 칼슘, 칼륨 등의 무기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봄배추는 김치나 겉절이를 해먹고 쌈을 싸서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또 봄배추는 여리고 약해서 절이지 않은 상태로 까나리액젓을 넣고 다진 마늘과 생강, 다진 파들을 넣고 골고루 섞은 뒤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려야 아삭아삭한 맛을 낼 수 있다.'


우직한 농사꾼의 아내다운 실로 대단한 찬양론이었다. 더불어 어설픈 시골아줌마인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겉절이를 맛나게 하는 비법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신 영미어머니께서 마치 봄배추 겉절이를 한입 가득 맛보신 모양으로 입맛을 쩝쩝하고 다시더니 입가를 흙 묻은 손으로 쓰윽 문지르신다.

그런 영미어머니의 모습과 또 입가로 묻어나는 흙을 바라보며 배추밭 고랑에 쪼그려 앉아 시골 아줌마 넷은 한바탕 웃음잔치를 벌였다.

▲ 배추를 솎으면서도 수다에 열심인 시골아지매들
ⓒ 김정혜
그때 친정어머니께서 한마디 거드셨다.

"겉절이도 좋고 또 살짝 데쳐서 된장에 조물락 조물락 무쳐 먹어도 좋지."

친정어머니의 그 말씀에 영미어머니는 뒤질세라 또 다른 요리법을 제시하셨다.

"멀겋게 푼 된장국물에 봄배추의 푸른 잎들을 손으로 뚝뚝 뜯어 넣고 된장국을 끓여봐. 거기다 청양고추 두어 개를 다져서 넣고 끓여놓으면 소고기국 부럽지 않지."

영미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주거니 받거니 하시는 봄배추 요리들은 긴 밭고랑처럼 길게 이어졌고 어느새 내 뱃속에선 허기짐의 아우성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내 김장김치로 익숙해진 우리들 입맛에 상큼한 봄배추 겉절이야 굳이 입속으로 넣어보지 않더라도 혀끝에서 살살 녹는 그 맛을 가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 보리밥과 된장에 무친 봄 배추와 구수한 된장찌개
ⓒ 김정혜
그때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배추를 솎고 있던 내게 친정어머니께서 불쑥 한마디 던지신다.

"이거는 사진 안 찍나?"

언젠가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사진을 찍어대는 딸자식의 뜬금없는 취미생활을 꼬집어 하신 말씀이었다.

친정어머니의 말씀에 영미어머니는,

"사진은 왜?"

영미어머니는 못내 궁금하신지 내 얼굴로 궁금증을 가득한 호기심의 시선을 건네신다.

"아, 맞다. 사진 찍어야지. 아주머니들의 말씀에 넋이 나가 사진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

나는 벌떡 일어나 밭고랑 사이를 종종 걸음 쳐 부리나케 카메라를 가져와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배추밭을 찍고 봄배추의 싱그러움도 찍고 다음으로 영미어머니와 친정어머니와 정희어머니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여기 보세요. 예쁜 얼굴들 좀 들어주세요. 그리고 다 아시죠? 김~~치~~~"

"볼품없는 시골 아지매들은 찍어서 뭐 할 건데?"

아마도 영미어머니는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가 도무지 궁금해서 못살겠다는 표정으로 자꾸만 그 연유를 다그치신다. 그런 영미어머니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줌마. 아줌마 봄배추 솎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기사 좀 쓸려고요. 그러니 멋지게 포즈 한번 잡아 보세요."
"뭐 기사. 그럼 내가 신문에 나온다는 그 말이야?"
"글쎄요. 기사가 날지 안 날지 그거는 저도 모르지요."
"그 말은 기사가 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잠깐 기다려봐. 내 가서 준비 좀 하고 올게."

벌떡 일어서시는 영미어머니를 보고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아줌마. 됐어요. 지금도 충분히 예쁘시니까 그냥 얼굴만 좀 들어보세요."
"아이 싫어. 그럼 나중에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찍어. 이대로는 안돼. 내가 신문에 나면 그건 집안의 경산데 이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지."

끝내 영미어머니는 얼굴을 들지 않으시고 고개를 더 숙이고 계셨다.

나는 결국 봄 배추밭의 아름다운 시골 아지매들의 얼굴을 찍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미어머니는 나중에 꼭 한번 제대로 찍어 달라며 몇 번이나 부탁을 하셨다.

그 사이 봄배추 솎은 것은 저마다 가져간 그릇들에 수북하게 담겨졌고 아주머니들은 엉덩이에 묻은 흙들을 툭툭 털며 집으로들 향하셨고, 그런 아주머니들 뒤로는 푸른 봄 배추들이 봄 햇살을 받아 더욱 더 싱그럽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봄날 오후. 봄 배추밭에서 벌어진 한바탕 수다는 봄배추 겉절이만큼이나 아삭아삭한 감칠맛으로 내게 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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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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