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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베개
예수를 죽인 것도 법이고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도 법이다. 예수와 소크라테스뿐일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법이라는 것이 빛좋은 개살구처럼 존재할수록 많은 이들은 더욱 침묵하며 더욱 신음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마저 침묵하지는 않았다. 민중들이 잡초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견뎌냈듯이 그들의 정의도 지켜졌다. 법과 권력이 정의를 이용해 먹을 때에도 정의는 지켜졌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의적'들에 의해서였다.

의적은 도둑이다. 그러나 도둑이 아니기도 하다. 의를 행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홍길동과 로빈 후드 등의 이름을 두고 누가 도둑이라고 손가락질하겠는가. 오히려 문학과 영화 등에서 이들을 의로운 도둑, 즉 의적이라고 치켜 세운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법학자 박홍규의 <의적, 정의를 훔치다>도 그런 맥락에서 의적을 바라보는 시선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의적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의적들의 활약과 그에 대한 평가 등을 다루고 있는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친숙한 이들인 로빈 후드, 풀란 데비, 홍길동 등의 이름들이다.

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로자 샨도르와 우크라이나의 마흐노 등의 생소한 이름의 의적들도 다수 눈에 띄며 육지의 의적뿐만 아니라 바다 위의 의적까지 다뤘다는 것도 <의적, 정의를 훔치다>의 특징이다. 비록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이 의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서가 아닌 '이야기 책'이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역사 속에서 한 몫 단단히 했던 의적 중의 의적의 활약상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의적, 정의를 훔치다>에 언급된 도둑들은 활동 지역부터 활동한 시기까지 천양지차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실상 의적으로 불리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이들이 권력자가 아니라 민중의 편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또한 복수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도 또 한 가지 공통점이다. 의적이 된 이들을 살펴보면 대개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에 상처받고 수모를 당한 사연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민중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그들을 대신해 심판의 칼을 세워 '복수'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작품에서 '복수'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의적의 복수는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민중의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중들에게 대리만족을 시켜 주고 민중의 한을 풀어 준다. 더불어 의적에게 '의적'의 명예를 만들어 준다. 의적이라 불리는 이들치고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도둑과 의적의 사이에는 '복수'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민중의 힘'을 보여준 증인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민중이 곧잘 '소'로 비유됐다. 소로 비유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좋은 의미도 있지만,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순한 동물'로 본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순한 민중을 수탈하고, 핍박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용해 먹었다. 그런데 민중과 함께 하는 의적의 존재는 이것의 역관계를 성립시켰다. 권력자들이 민중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민중의 뜻을 인정하게 만드는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인도 의적의 여왕 풀란 데비다. 풀란 데비는 삶 자체가 인도 민중들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기쁨을 몸소 보여 주고 있는데 그녀가 의적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권력자들의 집단 성폭행 같은 폭력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모든 이들이 그래야만 했는데 결국 그녀는 그들을 대신해 총과 칼을 들고 '꽃의 여왕' '도둑의 여왕'으로 불리는 의적이 된다. 그리고 민중들을 대신해 복수하고 권력자들이 민중을 두렵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훗날 인도 수상을 상대로 '천민계급'과 '성폭행당한 여자'들의 '인권 회복' 등을 조건으로 자수하여 11년을 복역하기도 했다. 석방 뒤 하층민 집단 거주지에서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던 그녀의 삶은 의적이 민중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삶이다.

의적은 왜 사랑 받았는가. 책의 제목을 빌리면 '정의'를 훔쳤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최상위 엘리트들은 민중들이 우매하다고 말했지만 이미 역사는 민중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민중들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비록 도둑이지만 그들이 법과 기득권이 외면한 정의를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의적을 사랑하지 않고 베길 도리가 있었겠는가.

로빈 후드, 판초 비야, 빌리 더 키드, 풀란 데비, 살바토레 줄리아노 등 <의적, 정의를 훔치다>에는 역사 속의 쟁쟁한 의적들이 다 모였다. 통쾌한 의적들의 이야기 하나만 해도 두고 두고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인데 여러 이야기가 한데 모였으니 당연하게도 그 재미는 배가 된다. 또한 함께 있다 보니 마치 서로 민중을 향해 무엇을 했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지켜 보는 것도 재미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니 의적들의 이야기가 모인 덕분에 특별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의적, 정의를 훔치다 - 박홍규의 세계 의적 이야기

박홍규 지음, 돌베개(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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