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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레질 하기 전의 논
써레질 하기 전의 논 ⓒ 송성영
모내기하던 날,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이구 조것도 농사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얼레? 저 냥반도 인저 벼농사를 다 짓네'하고 대견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꼬를 내는 일에서부터 모내기에 이르기까지 뭔가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고마운 분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나의 영원한 농사 사부님이신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는 한 가지를 물어보면 서 너 가지를 덤으로 끼워서 알려 주었습니다. 8년 가까이 한 동네에서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로 다퉜던 몇몇 동네 사람들도 뭔가를 알려 주고 싶어 했습니다.

논은 우리 집에서 200∼300미터쯤 떨어진 동네 주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논들과 뚝 떨어져 있어 농약을 치지 않아도 상관없는 곳입니다. 우리 집 하고 어우리 논농사를 짓고 있는 영주네 아빠는 다랑이 논 모양이 태극모양으로 되어 있어 벼가 잘 클 것이라 합니다. 논두렁이 태극 모양으로 어설프게 그려져 있긴 하지만 나 또한 그럴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코 딱지만한 논이었지만 이틀에 걸쳐 모내기를 했습니다. 손모내기를 하면서 질컥거리는 논흙에서 발 마사지를 실컷 했습니다. 첫날은 경운기로 써레질을 했는데 논물이 적당히 빠질 때를 기다려 오후쯤에 모내기를 시작했습니다. 갑사 주변에서 명상캠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 영주네 아빠는 소식지 발송을 해야 한다며 대전으로 나가 있어 조성일 형과 단 둘이서 모내기를 했습니다.

본래 몇몇 주변 사람들과 따로 날 잡아 모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물 대기가 쉽지 않아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비온 김에 일을 시작했던 것이라서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성일 형과 단둘이서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때 서울에서 남녘 출판사(운동권 학생들의 교과서처럼 여겨졌던 <미제 침략사>를 펴냄)를 운영했던 조성일 형은 출판사 일이 신통치 않아 고향, 공주에 내려와 논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나는 성일 형에게서 찬물이 직접 벼에 닿지 않도록 뒷물을 대는 일이며, 두렁 내는 일 등 논농사의 기초 지식을 배웠습니다.

"어이, 동생! 모 많이 심어 봤네벼!"

경운기를 몰고 가던 선우네 외삼촌이었습니다. 선우 외삼촌은 보은이 고향인데 5년 전쯤에 동네 입구 외딴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선우외삼촌과는 정식적으로 수인사조차 나눠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나만 보면 '어이, 동생 어디 가?' '동생 뭐 하는 겨'라고 스스럼없이 동생으로 불렀습니다.

속 좁은 나는 처음엔 '어이 씨, 뭐여, 언제 봤다구 다짜고짜 동생여'라고 불만을 품었지만 만나는 일이 한두 차례씩 늘어나면서 악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생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부르는 호칭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공연히 위세 떨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끼리 가깝게 지내보자는 식의 다정한 인사말이었습니다.

나는 쉽게 '형님'이라는 말이 튀어 나오지 않아, '아이구, 선우 외삼촌 아니세유' 혹은 '아저씨 어디 가세유'라는 식으로 '선우외삼촌' 혹은 '아저씨'라는 호칭을 써왔습니다. 선우 외삼촌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초지일관 나를 동생으로 불렀습니다. 늘 웃는 얼굴로 나를 동생으로 불러주는 그런 선우외삼촌이 좋았습니다.

동네 토박이가 아닌 우리는 동료의식을 발휘해 유난히 텃세가 심한 누구누구네 아버지나 인심 사나운 누구누구네 할머니를 헐뜯기도 했습니다. 선우 외삼촌이 '경운기 한 번 빌리는데 어찌나 위세 떠는지, 돈 주구 빌리는데 말여, 내 참 더러워서'라고 운을 떼면 나는 '그려유 그려, 그 양반 참 못 됐어유, 저번에…' 어쩌구 장단을 맞춥니다. 말 많은 동네 아줌마들처럼 말입니다.

선우 외삼촌은 아예 경운기를 길 한 옆에 세워두고 모심고 있는 논두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습니다.

"동생 모 많이 심어봤어?"
"그냥 조금유, 어렸을 때 못줄 잡아주고, 학교 다닐 때 농촌봉사활동 가서 좀 심어보고는 이번이 첨유."

논 가장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선우외삼촌과 맨입으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 성일 형이 나섰습니다.

"성영아, 모심는디 구경만 해두 힘이 나고 고마운 일인디, 막걸리 한잔 대접하지 않구 뭐하냐."

그날 결국 선우외삼촌은 막걸리 한잔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가던 길 멈추고 모심기까지 거들어주었습니다. 고향에서 수십 마지기의 논농사를 지어봤다는 선우외삼촌, 선수가 붙으니 손모내기에 금세 속도가 붙었습니다. 비록 막걸리 잔 기울이며 이바구 하는 시간이 더 많긴 했지만 선우외삼촌은 그날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전엔 그랬어, 농사일 나가다가 술판 보고 주저앉아, 농사일 다 잊어버리고 하루를 보내기도 했어, 그렇게 농사를 졌는디…."

"우리 동네 으른들두 그랬던 거 같유, 마루에 엉덩이만 슬쩍 걸터앉게 돼믄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구, 장화 벗고 턱하니 마루에 올라 주저앉게 돼믄 그날 농사일 접는 거였쥬, 그만큼 여유가 있었는디…."

그랬던 거 같습니다. 내 어릴 적에 다들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기 힘들 때도 하루 왼 종일 남의 집 마루장 신세를 질 수 있었던 그런 여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루 세끼는 물론이고 네 끼, 다섯 끼의 양식을 쌓아 놓고 사는데도 그런 여유는 눈꼽만큼도 없는 거 같습니다.

이렇게 첫날 모내기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다음날, 늦은 아침 다시 영주네 아빠하고 갑사 주변에서 명상캠프를 운영하고 있는 국선도 장사범과 함께 모내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내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또 다시 선우네 외삼촌이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동네 길모퉁이에서 만나 모셔왔다고 합니다. 선우외삼촌도 기꺼이 응했고요.

ⓒ 송성영
어제처럼 우리와 함께 모를 심어주던 선우외삼촌은 적당한 선에서 일손을 놓았습니다. 서울에 사는 조카들이 몰려와 개를 잡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토요일, 이른 수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집 인효 인상이와 인상이 친구 영신이가 싱글벙글 논두렁에 나타났습니다. 큰 아이 인효 녀석이 다짜고짜 소리칩니다.

"아빠 우리 논 어딨어!"

다랑이 논 중에는 댓 평 정도의 아주 작은 논배미가 있는데 그걸 아이들 몫으로 남겨놓았습니다. 벼 모판에 물을 주었으니 이제 다 자란 벼 포기를 옮겨 심어보고, 벼가 여물도록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녀석들 손으로 직접 피도 뽑아주고 고개 숙인 벼를 수확하게 할 예정입니다.

점심때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영주네 집 앞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아내와 영주엄마가 준비한 모내기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늘진 맨땅에서 길게 자빠져 있는데 저만치 도로가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영주네 아빠와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내기는 얼추 끝나고 있었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모내기 할 때 잔칫집처럼 떠들썩해야 제 맛이 나는 법이거든요. 우리 어려서는 그랬으니까요.

"어이구, 일꾼이 많이 와서 좋네."

그랬더니 영주아빠가 정색을 하면서 그럽니다.

"아녀요, 저 분들은 일꾼 아녀요."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인가 했지요. 그런데 이 양반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영주 아빠가 쪼르르 마중을 나갔습니다. 얼핏 인사하는 걸 보니 무슨 변호사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때서 영주 아빠가 일꾼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체 높으신 양반들'이라서 모내기할 일꾼들이 아니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좁은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변호사라는 양반이 신발을 벗고 바지까지 동동 걷어올리고는 논으로 냉큼 들어왔습니다.

열 줄 정도 남겨 놓은 마무리 상태였지만 그 변호사 양반 마음 씀씀이가 괜찮다 싶더군요. 그런데 내 기분은 다시 팍 상했습니다. 함께 온 무슨 감독이라는 사람이 변호사 양반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습니다. 모 몇 포기 심어놓고 모내기했다고 할 판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무슨 한의원 원장 부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우리집 아이들이 모 심는 곳에 가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열 포기도 채 안 돼는 모를 심어 놓고는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모심기에 관련된 노래였지 싶습니다.

한 성질 하는 나는 속이 뒤틀려 '이 양반들이 시방 뭔 짓거리들여, 신성한 밥상 앞에서 쇼 하는 것두 아니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습니다. 마음씨 착한 영주엄마를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영주네 손님이었으니까요.

모를 다 심고 나오는데 누군가 그럽니다.

"변호사님은 모 안 심어 봐서 힘드셨겠네요."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더 이상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3, 4학년생인 우리집 아이들보다도 적게 심었는데 어떻게 그런 아부를 할 수 있습니까? 변호사 양반이 80대 노인네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 많아야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데 모내기 현장에서도 그 놈의 지위고하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한나라당에서 대변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전여옥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은 대학 나온 사람이 해야 한다'고 했다던데, 모내기 현장에도 전여옥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그날 전여옥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졸자, 특히 변호사와 같은, 많이 배운 사람들은 모내기를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몇 줄의 모는 심어도 상관없다. 기념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모내기에 열중인 사람들은 이 꼴을 보고는 뭐라 했을까요? '역시 대학은 나와야 혀, 교양이 철철 넘치잖어, 모내기도 노래까지 곁들여 고상하게 심고, 매너도 끝내 주잖어, 비록 모 몇 포기 심었지만 사진도 멋들어지게 찍어가며 힘들지 않았냐고 깍듯하게 인사까지 주고 받고, 그래서 대학은 나와야 한다니께…' 그랬을까요? 아니면 '조런 싸가지 읎는 종자들 봤나! 저것들을 확!' 했을까요?

대학 못 나온 사람들이 '모내기 일꾼이 아닌 사람들'에게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라 말했다면 이것도 대학 못 나온 사람들의 콤플렉스일까요? 그 순간, 대학 근처도 가보지 않고 막노동으로 생활하는 선우네 외삼촌이 떠올랐습니다. '모내기 일꾼이 아닌 고상한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시도 때도 없이 '모내기 일꾼'을 자청하고 나서는 선우외삼촌은 참으로 교양 없어 보일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자신보다 나이가 적고 만만하게 보이면 다짜고짜 동생이라 부르고, 겉으로 들어내놓고 다른 사람들을 헐뜯기 일쑤니까요.

선우외삼촌은 '모내기 일꾼이 아닌 사람들'이 볼 때 교양머리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줄 아는 솔직한 선우외삼촌이 참 좋습니다. 본래 고집불통에 성격이 모난 나는 '모내기 일꾼이 아닌 사람들' 교양머리 넘치게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지체 높은 사람들'과는 막걸리 한 잔 주고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과는 잠시라도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내기 일꾼이 아닌 사람들' 흉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논에서 마악 나온 나의 아랫도리는 온통 논흙 범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혼자서 모내기를 다한 것처럼 온갖 생색을 다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집 인효 인상이와 인상이 친구 영신이도 참여했다.
우리집 인효 인상이와 인상이 친구 영신이도 참여했다. ⓒ 송성영
온통 흙투성이가 된 반바지와 발을 씻고 있는데 우리집 인효, 인상이 녀석과 인상이 친구 영신이가 논에서 나왔습니다. 맨발의 녀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녀석들이 모내기를 죄다 자신들이 다 한 것처럼 아랫도리에 온통 논흙을 묻히고 있었습니다. 녀석들은 '모내기 일꾼이 아닌 사람들'이 싸가지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관심도 없이 양손에 논흙이 잔뜩 묻어 있는 신발을 들고 헤벌쭉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 발이 엄청 부드러워진 거 같혀, 맨땅바닥에 대니께 땅이 엄청 딱딱하게 느껴져."

나는 녀석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모내기 일꾼이 아닌 사람들'이 똥폼을 잡거나 말거나 다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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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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