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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뒤편 산자락에 버려진 다랑이 논이 있었는데 그걸 포크레인을 동원해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주인의 허락을 맡았지요. 논은 오래 전에 이미 숲처럼 우거져 있었습니다. 대나무에서부터 버드나무, 고로쇠나무 등 장딴지 굵기만한 나무들이 심심찮게 들어서 있었습니다.
10년 넘게 묵혔던 논이었기에 온통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다랑이 논 형태는 그래도 남아 있었습니다. 포크레인 작업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런 대로 정리 정돈이 잘 됐습니다. 논으로 사용했던 땅이었기에 온통 개흙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보슬보슬한 흙이 살아 있었습니다. 농약에 쪄들지 않은 순결한 땅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밭 저 밭, 농약에 찌든 밭을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밭 가장자리에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개울 옆에 가뭄을 대비한 웅덩이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그마한 웅덩이 주변에는 뽕나무와 산 벚나무가 그늘을 내주고 있어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밭을 만들기 이전에 올해 두 마지기 남짓한 논까지 얻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조만간 '모내기 막차'(농약을 치지 않으려면 모내기를 늦게 하는 것이 좋다고들 하더군요)를 타고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막걸리 한 통 모셔놓고 손모내기를 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시골에 살면서 차마 농사짓고 산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농사짓는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500평 가까운 밭을 갈려면 관리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보행용 관리기 한 대에 185만원. 중고 관리기를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관리기는 천천히 구입하기로 하고 고구마를 심어야 할 시기가 코앞으로 닥쳐와 새벽부터 삽질을 했습니다.
한낮에는 땡볕을 피해 한숨을 돌리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삽질을 해댔습니다. 평소 같으면 일주일 내내 빈둥거리며 만들었을 고구마 밭이었는데 이틀만에 뚝딱 끝냈습니다. 컴퓨터 자판 두들기던 손은 갑작스러운 노동에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허리도 뻑적지근했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머리 속은 가벼웠습니다. 별 생각 없이 일하다 보니 '나'는 아주 가벼웠습니다.
이렇다할 계획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돈벌이에서 손을 놓고 생활비조차 보장 받을 수 없는 농사를 시작하자 걱정 반 기대 반, 반신반의 했던 아내도 즐겁게 일손을 거들어 주었습니다. 본래 느려터진 남편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히 맨땅을 파헤치자 믿음이 생긴 모양입니다.
아내를 설득하기까지에는 나름대로 청사진이 있었습니다. 고정수입원에서 손을 떼기 전에 나는 아내에게 검은 콩을 재배해 청국장을 만들어 판매하고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배달 형태로 판매하겠다는 '청사진'을 늘어놓았습니다.
또한 농약 한 방울 뿌리지 않고 우리가 가꾸게 될 유기농산물을 통해 주변 사람들과 뭔가 일을 벌여 보자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한 달에 두세 차례씩 가족캠프를 열 예정입니다. 일정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이렇다할 계획성 없는 모임을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 사실 이 무모한 계획은 이미 8년 전 시골에 들어올 때부터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8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시행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메주며 청국장, 솔잎차 등을 만들어 판매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 했지만 단 한 번도 판매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이번에도 역시 변변치 못한 남편을 믿고 따라 주었습니다. 500평이라는 밭까지 마련했는데 이번에는 설마, 라는 심정으로 기대를 걸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아내까지 동조해 주니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동네방네 소문을 냈습니다. 농사에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밭 자랑을 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계산을 했습니다. 밭농사 지어 과연 생활비라도 건질 수 있을까? 인건비나 제대로 건질 수 있을까? 이것 저것 공제하고 나면 밥술이나 뜰 수 있을까?
이것 저것 계산하면 그야말로 먹고 사는데 계산이 나오질 않습니다. 일년 내내 뼈 빠지게 농사 지어봤자 방송원고 몇 개월 쓰는 것보다 소출이 적을지도 모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굳이 힘든 농사일을 시작했냐고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잔머리 굴리는 일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자연 농법이니 생명농업이 어쩌고 저쩌고는 다 접어두고, 그냥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논밭을 갈다 보면 최소한 우리 네 식구가 먹을 양식만큼은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도시에 의존했던 반거충이 신세에서 벗어나 '자립경제'를 이루고자 시작한 일입니다. 든든한 자립경제의 바탕에서 좀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함께 꾸밀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입니다.
푸석푸석한 마른 땅에 고구마 순을 다 놓았더니 때마침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개울가에서 고무신을 툴툴 털어 흙발을 씻고 집에 돌아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바짝 마른입을 축이기 위해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꿀맛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느라 책에 코를 박고 있었고 아내는 맛있는 저녁상을 준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밭에서 꺾어 온 감자 꽃을 슬그머니 커피 잔에 꽂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고구마 심었더니 딱 맞춰 비가 오네, 하늘도 도와주는 개벼, 그렇치. 잉"
"감자 꽃이 참 이쁘네…."
아내는 부엌일을 놓고 감자 꽃을 바라봅니다. 우리 식구 중에 돈벌이를 놨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걱정은 걱정을 낳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녁이 행복한데 내일 일을 걱정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