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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넷품' 판 끝에 겨우 북경으로

샐러리맨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일까? 월급날 그리고 빨간색 숫자가 달력에서 많이 몰려 있는 연휴일 것이다. 현충일 연휴를 이용, 가볍게 중국을 다녀오려던 내 계획은 금방 벽에 부딪혔다. '내가 연휴면 남도 연휴'라는 사실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그 날짜의 북경 패키지 여행은 이미 예약 만료됐고, 있어도 가격이 두 배였다. 홧김에 비행기표만 예약하고 무조건 중국으로 가려 했지만 한국 국적기는 물론이고 중국 국적기도 비즈니스석까지 꽉 찬 상태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다지 중국을 선호했던가?

어머니께 만리장성 구경 시켜 드리려던 계획이 또 다시 무위로 끝날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발품이 아닌 넷품(인터넷 뒤지기)을 판 끝에 간신히 평소보다 약간 비싼 가격에 패키지 여행 상품을 예약하고 나름대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뻔한 일정인데 두 배가 더 넘는 여행 경비를 지불하지 않고 적정하게 비싼 경비를 지불하고 편안히 갈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나저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북경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뻤다. 나의 3박 4일 중국 북경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2 월드컵과 코리안 드림

▲ 왕푸징 거리에서 볼 수 있는 LG휴대폰 간판
ⓒ 김정은
공항에서 일행을 맞이한 여행 가이드는 어김없이 조선족이었다. 조선족하면 대체로 연변 사람일 거라던 예상과 다르게 흑룡강성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이드는 말끝마다 "한국보다 못하겠지만"이라는 말을 남발했다. 알고 보니 이 가이드,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입장권을 사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려다 공항 문턱도 못 밟고 되돌아간 쓰라린 과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못 가본 한국에 대한 선망이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 배여 나온 것이 아닐까?

당시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 오기 위해 웃돈을 주고 입장권을 사려 하고, 심지어 가짜 티켓까지 돌아다닌다는 뉴스는 신문을 통해 접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 당시의 현장 상황을 조선족에게 듣고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던 것 같다. 결국 월드컵 입장권이 한국에서의 불법 체류를 위한 '티켓'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태를 일찍 파악한 우리 나라 쪽에서 출입국 심사를 엄격하게 한 탓에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인천공항 문턱도 못밟고 중국으로 되돌아갔다는 것.

정작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땅이 살기 싫다고 너도 나도 이민 보따리를 싸서 나가는 판인데 왜 이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에 기를 쓰고 들어오려 할까? 그 의문은 가이드의 대답으로 쉽게 풀렸다.

"한 때 우리 고향에서는 한국에서 돈 1억원을 벌어 온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지요. 지금은 이곳도 물가가 많이 올랐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국 돈 1억원은 엄청난 재산이었거든요. 그러니 너도 나도 웃돈 주고 한국에 가겠다고 할 밖에요. 물론 한국 가서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지만 1~2년간 한국에서 성실히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 웬만큼 크고 좋은 아파트 한 채와 가게를 사서 편안하게 살 수 있지요."

가이드 말을 들으니 회사 옆 식당에서 일했던 조선족 부부가 갑자기 떠오른다. 한국살이 2년만에 고향에 집을 사 놓았다던 그 부부도 말끝마다 "때가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말했다. 식당 주인이 바뀌는 바람에 더 이상 그 부부를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 그들은 소망대로 고향에 돌아가 조그만 가게를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1년만 더, 1년만 더를 외치며 한국 내 식당을 전전하고 있을까?

이런 저런 잡념에 빠져 있는 사이 관광객을 실은 버스는 어느새 북경의 명동이라는 왕푸징(王府井)거리에 우리들을 내려 놓았다.

왕푸징 거리의 낮과 밤

왕푸징(王府井)이란 이름은 한자의 뜻대로 황실 전용 우물이 있었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아직도 왕푸징 거리에는 동판으로 표시된 우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왕푸징 거리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명대(明代)부터다. 이곳이 전문 상업 지역으로 조성되기 시작하더니 청대(靑代)에 와서 현재의 상점이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저자거리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 왕푸징 거리의 유래가 된 황실 우물이 있었다는 자리
ⓒ 김정은
이처럼 역사적인 왕푸징 거리가 지금과 같은 현대식 도로로 탈바꿈한 것은 1997년부터라고 한다. 중국 정부는 인민폐 10억 위안의 예산을 이곳에 투입, 쇼핑객들을 위한 금연 구역을 지정하는 한편 승용차 없는 쇼핑거리로 재탄생시켰다. 특히 지난 99년에는 중국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또 다시 대대적인 건물 개조와 도로 건설, 환경미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현재는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거리 미화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 나라 기업의 휴대전화 광고판이나 그들만의 맥도널드(麥當勞), KFC(肯德基) 간판 또한 왕푸징 쇼핑거리에 손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고급스런 화강암으로 넓게 조성해 놓은 도로 곳곳에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청동 조각상을 설치해 놓아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왕푸징 거리 곳곳에 설치해놓은 인력거 모양의 청동 조각상
ⓒ 김정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왕푸징 거리의 매력은 낮이 아니라 밤에 찾을 수 있다. 이미 우리 나라 매스컴에서 수도 없이 많이 나갔던 엽기적인 전갈 꼬치를 파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오후 5시 정도가 되니 슬슬 이런 저런 음식을 파는 야시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곳도 최근 정부의 정찰제 실시로 어디를 가나 음식 가격이 똑같았다.

대략적인 이곳의 정가는 보통 5위안(한국 돈 650원) 수준, 일단 5위안짜리 소고기 꼬치와 탕후류(과일설탕조림) 하나씩을 사 들고 슬슬 음식 구경을 다녔다. 흔히 볼 수 있는 꼬치 요리와 탕후류, 만두와 각종 냉차를 비롯해 우리가 보통 엽기적인 음식이라 생각하는 전갈, 뱀껍질, 개구리, 소힘줄, 메뚜기, 지네, 매미 등으로 만든 꼬치 튀김도 5위안 정도면 맛볼 수 있었다.

얼마 전 한국의 모 프로그램에 방영된 곳이라는 한글 간판이 있는 노점도 이색적이었다. 이밖에도 특이한 음식이 있었다면 근처조차 가기 힘들 만큼 냄새가 진동하는 '썩힌 두부'였다. 색깔이 검을수록 더욱 냄새가 진동하는 이 두부의 맛은 도대체 어떨까 궁금했지만 도저히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부를 맛있게 먹고 있는 한 중국인의 모습이 특이해 구경을 했더니 그 중국인이 웃으면서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건넨다(이 사람이 북경에서 영어로 대화했던 거의 유일무이한 중국인이었다).

▲ 왕푸징 거리 야시장
ⓒ 김정은
▲ 다양한 종류의 꼬치
ⓒ 김정은
나는 사우스 코리안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대뜸 남이냐 북이냐를 묻는다. 이렇게 넘쳐나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보면서도 도대체 이 사람이 남북을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쪽인지 알고서도 일부러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남북이 헷갈린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사우스 코리아'라 했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 웃음을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외국인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분단된 나라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무리 중국 여행을 가는 한국인들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는 '코리안'이 아닌 사우스 코리안이었다.

분단된 민족이라는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그 사람과 헤어져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여전히 그 중국인이 묻던 말이 머리 속을 맴돈다. 내가 외국인에게 사우스 코리안이 아닌 '코리안'으로 불리게 될 날은 언제인가. 과연 그날이 오긴 올까? 가까운 듯하면서도 여전히 서로 멀리 있는 분단 한반도... 1시간 반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중국에서 바라본 내 나라 땅의 모습이었다.

덧붙이는 글 | 6월4일부터 7일까지 떠난 중국 여행기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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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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