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또 있었다. 12월말 4대 법안 처리 과정에서 박근혜 대표와의 불협화음으로 김 의원은 사직서를 준비했다. 하지만 꺼내들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행정도시법 합의 '빅딜설'을 제기하며 지도부를 흔드는 비주류 의원들의 공세에도 버텼지만 전재희 의원의 단식농성은 그를 물러나게 하는 결정타였다. 남은 정치인생에 도덕적 흠집까지 낼 순 없었다.
당시 김 의원은 원내대표직 사퇴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표 중심으로 단합해서 새롭게 출발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호소한다"라는 말을 남긴채 동면에 들어갔다. 겉돌던 그를 다시 불러 낸 건 박근혜 대표였다.
지난주 윤광웅 국방장관 해임결의안 등의 처리를 앞두고 본회의장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박 대표는 김 의원을 호출했다. 원내전략을 상의하기 위해서다. 김 의원은 국방장관해임건 보다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방위산업청신설법안에 주목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각각 제출한 법안이었고 김 의원은 두 당의 공조를 심상치 않게 바라 봤다.
김 의원은 이어 강재섭 원내대표도 만났고, 즉석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회의에 참석해 아이디어를 보탰다. 기자들 사이에선 "역시 DR(김덕룡 의원의 이니셜)은 위기 때 등장한다"는 말이 오갔다.
반면 강재섭 원내대표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강 원내대표는 본회의 입장을 종용하며 "여러분이 뽑아준 원내대표에게 맡겨달라"며 의원들에게 '행동지침'을 전달했다. 두 법안을 처리할 경우 단상 앞으로 나가 소리도 치고 거세게 항의하라고 주문했다. 본회의 불참이라는 파행은 막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안상수 의원은 "우리더러 쇼하라는 거냐"고 반발했다.
원내대표의 이 같은 설득해도 의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상당수 의원들은 의원총회장에 남아 불참 의사를 표시했다. 결국 이들을 본회의장으로 끌어들인 건 박 대표였다. 박 대표는 파행은 막아야 한다며 본회의장에서 반대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 국민에게 알리는 쪽이 낫다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원내대표실의 한 관계자는 "원내·원외 구분이 없다, 혼자 다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신(新)여대야소'와 'DR 역할론'
강재섭 원내대표와 김덕룡 전 원내대표의 엇갈린 행보는 이날 회의에서 드러났다. 회의 시작 전 의원들은 서로 환담을 나눴고 박 대표는 "모처럼 다들 모이셨다"고 웃는 표정을 지었다.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이강두 최고위원을 향해 이규택 최고위원이 "나라가 이 모양인데 외국에 나가면 되겠냐"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김덕룡 의원은 "한국에서는 배울 게 없다는 말들이 많다"고 말을 이었다. 이에 맹형규 정책위의장이 "경제도 무너지고… 한국에선 배울 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고 하더다"고 거들었다.
우스개 소리를 잘하는 강 원내대표는 끼어 들지 않았다. 또한 이례적으로 1시간 가량 길게 진행된 비공개회의에서 강 원내대표는 말이 없었다. 전여옥 대변인이 전한 원내대표의 발언은 "지금도 사실상 여대야소 아닌가"라는 한 문장. 김덕룡 의원이 "노 대통령의 연정 운운에 대해 절대 한나라당은 협력하지 않겠다"며 "여소야대는 국민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하자 이같이 운을 뗐던 것이다.
김덕룡 의원의 뜻밖의 출연에 그가 어디에 앉을까도 관심사였다. 그는 박 대표 우측을 늘 차지하는 강 원내대표 다음 자리에 앉았다.
한편 김덕룡 원내대표는 회의가 끝난 뒤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공조로 통과된 정부조직법과 방위산업청신설에 대해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국회의 2가지 큰 기둥이 무너졌다. 상임위원회 중심의 심의 의결이라는 원칙과 교섭단체 합의에 따른 운영이라는 점이다. 나쁜 전례를 낳았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하루빨리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김 의원은 두 당의 공조로 부각된 '신(新)여대야소' 국면을 심상치 않게 바라봤다. 여기에 노 대통령의 연정 발언도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니냐는 것. 그와 맞물려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도 불이 붙는 모양새다.
김 의원은 작년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정치권에선 처음으로 개헌 논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원내대표 사퇴 후 김원기 국회의장과 만나며 개헌에 관한 의견 교환을 해왔다는 후문이다. 정치권이 한판 요동칠 이슈들을 앞두고 5선의 김덕룡 의원이 하게 될 '역할'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