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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제 13명이 묻힌 명 13릉

"사람이란 본디 한 번 죽을 뿐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이나 가볍기도 하니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까닭이다."(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 <사기>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지상에서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자일수록 죽음 앞에서 더욱 더 초라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에 누렸던 권력과 부귀영화를 사후세계에도 누리기 위해 풍수를 고려한 명당자리에 터를 잡아 엄청난 재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왕릉을 만들었다.

베이징 북서쪽으로 44㎞ 떨어진 천수산(天壽山) 자락에는 명나라 황제 16명 중 13명이 모여 있다는 명 13릉이 있다. 그중에서 현재 무덤 내부가 외부에 공개된 정릉의 주인은 신종이라 불리우는 만력제 주익균이다.

10살이란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한 그는 즉위 초기에는 대학사(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하여 꽤 개혁적인 정치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거정이 사망하고 성년이 되어 직접 친정(親政)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180도 달라져 신종은 주색에 탐닉하여 정사를 팽개치는가 하면 태자 책봉을 둘러싼 심각한 정쟁으로 국정이 혼란해졌고 정릉같은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킨 결과, 국고가 탕진되는 위기를 맞았다.

거기에다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출병 등 해외파병으로 국력은 날로 쇠진되면서 명 왕조는 점점 쇠퇴의 길을 가게 되었다.

무자비 속에 숨은 후대의 잔인한 평가

▲ 만력제의 무자비,한 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끈 인물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매우 잔인했다
ⓒ 김정은
한 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끈 인물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매우 잔인했다. 오죽하면 그의 사후 그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며 비석에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를 세웠겠는가? 원이라는 이민족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 한족 스스로 중원을 정복하여 세운 한족정권인 명나라가 또 다른 이민족인 청나라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한족의 입장에서도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 쇠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았던 신종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일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왕릉의 규모만 놓고 보면 지하궁전이라는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뽐내고 있다.

실제 1956년, 당시 주은래가 정릉 발굴을 재가하고 1년간의 발굴을 거쳐 정릉의 지하가 처음 공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화려하게 단장된 지하 깊이 27m, 총면적 1195㎡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궁전에서 황제와 두황후의 시신은 물론이고 3000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 정릉 출토유물
ⓒ 김정은
이럭저럭 무덤 속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이용해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전(前), 중(中), 후(後), 좌(左), 우(右) 5개의 크고 넓은 전당(殿堂)으로 연결된 만력제의 무덤으로 들어가게 된다. 무덤 중앙에는 백옥으로 용과 봉황을 조각한 황제와 두 황후의 보좌(寶座)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불을 지피던 기름항아리가 놓여 있다. 좌우에는 관을 놓은 침상만 있고 관은 없으며, 뒷부분에는 만력황제와 효단황후(孝端皇后), 효정황후(孝靖皇后)의 모형관이 어마어마하게 큰 크기로 놓여 있다.

문화대혁명 중 태워진 황제와 황후의 시신

이처럼 지하 정릉의 규모는 신종이 이 곳에서 25년간 주색에 빠져 조정에 들지 않았을 정도로 애착을 보인 만큼 지상의 궁궐을 그대로 지하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무덤의 앞날은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 무덤 안 황제의 옥좌 ,용이 새겨져 있다.
ⓒ 김정은
명 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 정릉은 농민군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발굴 후 전국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발굴되었던 황제와 두황후의 시신을 불태워지기까지 했으니 화려한 무덤 건축으로 영혼의 편안함을 원했던 그의 사후가 그리 편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생전의 무능했던 정치의 인과응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김정은
다음 목적지인 만리장성을 향해 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죽음을 담보하는 것은 호화로운 무덤이 아니라 바로 죽기 직전까지 일평생 살아온 자신의 삶 자체이다. 산 속에 버려진 주검이라도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의 삶이 충실했다면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일 것이고 아무리 호화스러운 무덤에 묻히더라도 자신의 삶에 불충실했다면 터럭만큼 가벼운 죽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명 13릉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어머니와 함께 한 북경 여행기 4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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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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