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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희 엄마가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아프다고 할 때 나를 비롯하여 동네 사람들은 단순히 몸살감기려니 했습니다. 보건소에서 주사 한 대 맞고 좀 쉬면 나아지려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날 받아 놓은 노인네들도 많은데 젊은 것이 조금 아프다고 어지간히 유세를 한다고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올해 마흔 아홉 살의 순희 엄마는 청각 장애가 있습니다. 선천적인 장애가 아니라 어릴 적에 열병을 앓고 난 후유증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희 엄마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대신 눈썰미를 타고 났고 손재주는 9단입니다.
순희 엄마는 청소와 정리정돈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어떤 지저분한 공간도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말끔하게 변신을 합니다. 거기에 음식 솜씨까지 좋아서 잔치집이나 음식점의 스카우트 1호 대상입니다.
순희 아빠 역시 장애가 있어서 힘든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순희 엄마는 부지런하고 깔끔한 일솜씨를 내세워 담뱃잎 따는 일이며 표고버섯 종균 넣는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왔습니다. 농사 채가 별로 없는 시골 살림에서 순희 엄마가 품을 팔아서 번 돈은 오누이의 학비가 되고 기제사며 명절에 요긴하게 쓰여 왔습니다.
두 남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고부터 순희 엄마의 고단한 인생에도 봄날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장애가 있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 승철이와 순희 오누이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동네에서는 다 알아주었습니다. 덕분에 순희 엄마는 오누이가 있는 도시에 다니러 갈 때마다 그 동안 귀가 어둡고 말을 못해서 선뜻 나서지 못했던 세상구경을 남매를 앞세우고 실컷 하고 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늦복이 터졌다고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꺼번에 사던 순희 엄마였습니다.
"친정에 갔다가 쓰러졌는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대학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왔슈. 급성 백혈병이라고 하는디 의사 말을 통 알아들을 수가 없네유…."
장맛비가 그친 사이에 우리 커다란 집(폐교)을 대청소하기 위해 순희 엄마를 데리러 갔더니 순희 아빠가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이런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던 순희 엄마가 이제 기를 펴고 살만해지니까 시샘이라도 하는 듯 청천벽력이 떨어졌습니다.
순희 엄마는 정말 '영상기록 24시'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대로 비닐커튼이 쳐진 무균 병실에서 핏기가 없이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혈관이라는 혈관은 다 숨어버려서 주사 한 바늘조차 꽂을 수 없는 팔 대신 가슴에 구멍을 뚫어 튜브를 연결한 순희 엄마의 모습은 낯선 나라 사람 같았습니다. 그동안 적당한 노동으로 다부졌던 순희 엄마의 체구도 며칠 사이에 병색이 역력하게 살이 내려 있었습니다.
순희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소독액으로 손을 씻고 입과 코에 마스크를 했어도 현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난 주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와서 제품 포장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순희 엄마였습니다. 열무김치가 맛있게 담아졌거나 별미라도 만들면 한 사발이라도 꼭 우리 집에 가지고 와서 맛을 보여주던 정겨운 이웃이었던 순희 엄마의 갑작스런 발병이 정말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순희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입술 모양을 보고 상대의 말을 짐작하는 순희 엄마한테는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손을 잡아 주고는 힘내라는 눈빛만 보내주었을 뿐입니다.
최루성 멜로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백혈병은 그 치명성보다는 왠지 예쁘지만 연약한 '소나기'의 여주인공처럼 생긴 여자들만 걸릴 것 같은 낭만적(?)인 병처럼 생각했었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 속에만 있는 가상의 불치병인 줄 알았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송과 매체를 통해서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사람들에 대한 소개가 부쩍 늘어난 덕에 이제는 그 병에 관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백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당장 순희 엄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항암치료부터 하고 나서 상태를 봐가면서 골수 이식을 결정한대요."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그만두고 엄마의 병간호를 하게 된 순희에게 골수 이식이니 항암치료니 하는 말을 듣고서야 순희 엄마의 병세가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앞으로 순희 엄마가 이겨내야 할 고통의 시간들을 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습니다.
"이틀 입원했는데 병원비가 백만원이 넘게 나왔대유."
순희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은 온전히 순희 엄마의 몫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남겨졌습니다.
돌아오는 가을 순희 아빠 생일에는 애들이 뷔페에서 멋있게 해준다고 했다고 자식 자랑이 늘어졌던 순희 엄마의 활기찬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순희 엄마가 담아주는 물김치 맛도 더 이상 못 볼 것입니다.
이제 순희 엄마와 가족들에게 닥친 시련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방법을 찾으러 나서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전원주택 라이프 8월호에도 송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