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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줄이 아버지와 어머니
ⓒ 이창기
아버지가 황천수 건너 북망산으로 가신 지 퍽이나 흘러 벌써 가족들은 49제를 준비한다고 부산하다.

아직도 내 가슴에는 아버지가 꼭 살아계신 것만 같은데 어머니를 모시러 고향집에 갔을 때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갈하던 고향집 마당은 을씨년스러웠고 방 한구석에 허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가 홀로 누워 있었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명하시기 두어 달 전 아버지와 마지막 유달산 여행을 떠난 승용차 안에서 아버지는 늘 지갑이 비어있는 셋째 아들이 가슴 아프다며 10만원을 주셨다. 그러더니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말라며 못내 아쉬우신 지 5만원을 더 꺼내서 손에 쥐어주셨다.

그러면서 셋째가 집도 없이 제일 어렵게 산다고 논도 제일 큰 논을 물려주시겠다고, 통일운동도 건강해야 한다고, 밥 굶지 말고 아내랑 오순도순 잘 살라고, 힘겹게 말을 맺더니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지신 듯 차 시트에 몸을 포근히 기대셨다.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발 셋째에 대한 걱정을 놓고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런 저런 말로 설득을 해보았지만 그저 입바른 소리라는 듯이 아버지는 걱정뿐이다.

의사의 예견대로 아버지는 폐암이 발견된 지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그러나 임종의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은 그지없이 평온하였다. 환자복을 갈아입히려고 아버지의 윗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 아버지는 내 팔 안에서 그렇게나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그만 멈추셨다. 그리고 평안하고 고요한 얼굴로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셋째의 삶의 가치를 다는 아닐지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아들의 안녕이 걱정되신 것이었다. 참으로 평안해 보이는 아버지의 표정에서 나는 그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해방직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래서 더욱 통일운동을 하는 아들을 걱정했으리라. 그러나 해방직후 학살된 사람들도 저 세상으로 갔고 아버지처럼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도 저 세상으로 가고 있다. 죽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결국 남는 것은 그가 죽기 전에 사회에 남긴 자취이다.

하기에 민족과 인류를 위해 일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런 아들을 하나라도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 아버지의 삶이 훌륭한 것이었다고 여긴다. 지금은 지하에 계시지만 나에게 살과 피를 주신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민족과 인류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살겠다고 의지를 다져도 가슴 한 편에 한으로 남는 것은 살아계실 때 좀 더 잘 해드릴 걸 하는 후회다. 큰 형은 값비싼 양복도 해드리고 둘째형은 철마다 용돈에 보일러 기름도 넣어드렸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었다.

그렇게 반가워하시는 전화라도 자주 걸어드리고 금강산 구경이라도 시켜드렸더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쓰리지는 않았을 것을.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한다는 말이 얼마나 가슴 쓰린 말인지 겪어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음을 이 못난 아들은 이렇게 깨닫고야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자주민보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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