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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가 바람을 경영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바람의 힘은 곡식을 빻는 일보다 훨씬 더 생산성 있는 일에 쓰일 수 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바람을 경영하는 새로운 방식인 이 일을 위해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풍차의 돛(또는 팔)은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이라는 현대적인 재질의 바람개비로 변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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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경영하라(1)

보통 3개의 날개로 이루어지는 이 바람개비에 의해, 바람은 풍차에서 곡식을 빻고 나면 사라지고 마는 일회성 에너지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풍력 발전이라는 이 새로운 방식에 힘입어, 먼지 잔뜩 낀 낡은 풍차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바람의 힘은 이제 한 곳에 저장되었다가 멀리 운반되어 무수히 많은 용도로 활용되는 다용도의 전기 에너지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 풍력발전에 쓰이는 대형 바람개비의 모습
ⓒ 정철용
고전적인 풍차의 작동 원리를 현대적으로 응용한 이러한 풍력 발전은 최근 들어 각광을 받고 있다. 올해 초, 교토 의정서가 발효됨에 따라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대체 에너지원 개발에 세계 각국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풍력 발전은 그 유력한 대안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올해 동해안 영덕에 풍력발전단지가 설치되어 가동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독일, 덴마크, 스페인 등 일찍부터 풍력 발전을 시작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비하면 한참 늦은 출발이고 발전 규모도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뉴질랜드의 풍력 발전 역시 유럽의 풍력 발전 강국들보다는 한참 늦은 시기인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아직도 초기 단계에 있다. 전국적으로 생산되는 전력의 겨우 2.5%에 불과한 168메가와트(MW)를 생산하고 있는 뉴질랜드의 풍력 발전은 아직은 세계에 내세울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바람에 관한 한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어서 뉴질랜드 풍력 발전의 잠재력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에 우리가 만난 타라루아 윈드 팜(Tararua Wind Farm)은 그 시금석이 되고 있는 곳으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 낮은 구릉들과 벌판이 이어지는 한적한 농촌 지역 타라루아의 전형적인 풍경
ⓒ 정철용
타라루아는 뉴질랜드 북섬의 남부를 동서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루아히네 산맥과 타라루아 산맥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적한 농촌 지역이다. 큰 도시 하나 없이 낮은 구릉들과 푸른 벌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작은 마을 몇 개가 점점이 숨어 있을 뿐이어서, 오랫동안 좀처럼 여행객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타라루아 산맥의 북쪽 끝자락에 타라루아 윈드 팜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은 매력적인 여행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낮은 구릉들 위에 줄지어 서 있는 103개의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은빛 날개를 반짝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멋진 모습을 구경하려고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여행 안내 책자에 소개되어 있는 멋진 사진에 매혹된 나 역시 무리한 일정인 줄을 알면서도 이 장관을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이 지역의 중심 마을인 우드빌(Woodville)에 차가 가까워지자 멀리 언덕 위에 은빛 바람개비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 타라루아의 낮은 구릉들 위에 자리잡고 있는 바람개비들의 모습
ⓒ 정철용
내 시선이 자꾸 그 쪽으로 돌아가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내 손을 탁 쳤다.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나는 우드빌에서 파머스턴 노쓰로 이어지는 마나와투 골짜기 고갯길로 향했다. 그곳이 타라루아 윈드 팜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은 막혀있었다. 두어 달 전쯤에 내린 폭우로 도로의 일부가 유실되고 도로 주변의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 도로가 통제되었다는 뉴스를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복구 공사가 끝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 바람개비들이 서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것. 나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우드빌 여행자정보센터에서 가져온 타라루아 지역 세부 지도를 펼쳐보았다. 타라루아 윈드 팜까지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는 막다른 작은 길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길을 타고 가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그 길은 험했다. 낭떠러지를 옆에 끼고 구불구불 가파르게 이어지는 비좁고 흙먼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비포장길이었다. 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가까스로 그 꼭대기에 도착했다.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척척하게 젖은 내 등과 얼굴을 식혀주었다.

▲ 남반구 최대의 풍력발전단지인 타라루아 윈드 팜의 모습
ⓒ 정철용
그 바람을 받아 수십 개의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만곡을 이루고 있는 구릉들 위에 적당한 간격으로 우뚝 서서 은빛 날개들을 돌리고 있는 바람개비들의 모습은 정말 이색적이었다. 그 아래 가까이 다가서자 '웅웅' 거리며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가 웅장한 심포니의 배음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양들과 소들의 목초지였던 이 구릉들이 바람을 경영하는 농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불과 4년 전이었다. 연중 85% 이상의 기간 동안 평균 풍속 35km의 바람이 늘 불어대는 천혜의 입지조건 때문에 남반구 최대의 풍력발전단지로 개발이 된 것이다.

가축농장에서 바람농장으로의 이 변신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타라루아 윈드 팜은 매년 3만 가구가 쓸 수 있는 정도의 전력을 생산해서 이 지역 주민에게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타라루아 윈드 팜에 힘입어 관광산업의 불모지였던 이 지역이 이제는 매력적인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 타라루아 윈드 팜의 바람개비는 덴마크 업체의 제품이다.
ⓒ 정철용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타라루아 윈드 팜의 바람개비들을 제조하여 설치한 업체 베스타스(Vestas)가 덴마크의 회사인 것처럼, 이 지역에는 일찍이 덴마크와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드빌의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노스우드(Norsewood)와 단네비르케(Dannevirke) 등은 그 마을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1870년대에 이주해 온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세운 마을이라고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 타라루아 윈드 팜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네덜란드의 고전적인 전통 풍차도, 덴마크의 현대식 풍력발전단지도 뉴질랜드에서는 모두 관광산업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바람을 경영하여 관광상품으로 변모시킨 모습을 나는 폭스턴의 풍차와 타라루아의 윈드 팜에서 보았다.

흙먼지 나는 길을 다시 조심스럽게 내려와 바라본 언덕 위에는 마치 작별을 고하듯이 바람개비들이 하얀 날개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해 4월에 다녀왔던 뉴질랜드 북섬 남서부 일대의 여행기입니다.
다음 글은 "카피티 해안에서 맞이한 저녁과 아침"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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