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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 같다. 삼성에서 흘러나오는 X파일 공개 이후 대응책이 엇갈리고 있다.
SBS는 지난 23일, 삼성 고위 관계자의 입을 빌려 홍석현 주미 대사가 조만간 사퇴 의사를 표명할 것이며, 이 사퇴 시기에 맞춰 삼성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다음날 MBC는 향후 대응책을 놓고 삼성 내부에서 강온 양론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MBC가 보도한 삼성 내 강온 양 기류는 오늘자 조간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일보>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임원이 삼성의 대국민 사과설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펄쩍 뛰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더 나아가 “삼성 법무팀에서 일하고 있는 법조인들은 ‘만일 MBC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모두 퇴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그러나 “그룹 차원에서 각계에 이번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 등 여론을 파악하고 있어 결국 사과문을 발표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겨레>도 삼성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만큼 일단은 바짝 엎드린 채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하면서 “법적으로 소송하게 될 언론사는 극소수가 될 확률이 높다”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관계자의 말을 보도했다.
강온 양 기류는 한때 삼성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에서도 감지된다. <중앙일보>는 어젯밤 ‘다시 한 번 뼈를 깎는 자기반성 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후 밤 11시 10분쯤에 내렸다가, 다시 오늘자 조간에서 1면에 게재했다.
뼈를 깎는 반성을 하겠지만 홍석현 대사가 이미 대선 때의 일로 괘씸죄에 걸려 감옥까지 갔다온 만큼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대가를 치른 것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게 요지인 이 사설이 어떤 이유로 홈페이지에서 게재-삭제의 풍파를 당해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앙일보> 내부에서 의견 분열 내지 혼선이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정리하자면 삼성은 강경기조를 고수하면서도 퇴로를 모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삼성이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강경기조를 쉬 접지 않는 이유는 법적인 승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삼성 법조팀을 지휘하고 있는 이종왕 법무실장은 “통신비밀보호법 관련 판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번 MBC 보도 건은 반드시 소송을 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해석하자면 이종왕 실장은 법정으로 갈 경우 이길 공산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럴 만도 하다. 현행 형사소송법에서는 불법으로 도청된 자료는 증거로 채택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따라서 설령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다 해도 불법정치자금 수수, 특히 이 과정에서의 이건희 회장의 역할을 입증할 물증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불법 도청 테이프를 증거로 활용할 수 없는 검찰 입장에선 홍석현 주미 대사나 이학수 삼성 부회장의 진술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이 순순히 실토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이 진술을 거부할 경우 검찰이 의존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오고간 돈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겠지만 이 또한 난망이다. X파일에서 언급됐듯이 오고간 불법정치자금은 수표가 아니라 ‘오리발’, 즉 현금이다.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다.
삼성이 기댈 수 있는 게 이런 법 논리만은 아니다. 어제부터 시중에서는 이상한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음모론이다. 이회창 전 총재를 포함한 한나라당과 <중앙일보>가 집중 제기하기 시작한 음모론의 핵심은 표적론. 수백개에 달하는 녹음 테이프 가운데 유독 삼성과 이회창 전 총재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테이프가 공개된 데에는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음모론은 안기부 내 불법 도청팀인 미림팀 팀장이었던 공모씨가 어제 SBS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입 열면 안 다칠 언론사가 없다”고 밝힘으로써 더욱 증폭되기 시작했고, <중앙일보>는 공씨의 말을 이어 DJ측근 등의 도청 테이프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나섰다.
음모론이 세를 얻을 경우 삼성으로선 적지 않게 힘을 받을 수 있다. 찌르는 칼보다 겨누는 칼이 더 무섭다는 옛말처럼 공씨의 “까불지 말라”는 말에 다른 언론사나 정치인이 찔끔할 경우 삼성에 대한 비난 여론은 조금씩 힘을 잃을 수 있다. 만에 하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2의 도청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여론의 과녁이 분산되면서 물타기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설령 제2의 도청 테이프가 공개되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X파일의 ‘약발’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차피 ‘팩트’로 먹고 사는 언론사 입장에서 이미 공개된 X파일로 허구한 날 재탕 삼탕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삼성이 못했을 리는 없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여론이지 삼성이 아니다.
승산이 적지 않은 입장에서 초장에 납작 엎드릴 이유가 삼성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매양 강경일변도로 가기에도 부담스럽다. 이 점 때문에 삼성은 퇴로를 미리 확보하는 예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승기를 잡는다 해도 ‘오버’를 하면 역공에 휘말릴 수 있는 법. 삼성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버 액션’을 가늠하는 잣대는 소송이다. X파일을 받아 보도한 모든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건 ‘오버’다. 전선을 여러 곳에 펼치면 이로울 게 없다. 마구잡이 소송으로 언론사 다수를 적으로 삼는 건 삼성으로선 실이다. 공세 강도가 약한 언론사를 전선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게 삼성으로선 득이다. 이들 언론사가 음모론 유포 대열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구경꾼으로 비껴나게 하면 삼성은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삼성이 소송 대상을 MBC 등 극소수 언론사로 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X파일의 진원지인 MBC에게만 본보기로 소송을 냄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상징만 확보하면 된다. 삼성이 이르면 오늘 중으로 MBC를 상대로 소송을 낼 것이란 보도는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삼성이 MBC를 걸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상징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퇴로 확보 차원에서도 MBC에 대한 소송은 필요하다. 상황이 삼성이 기대하는 대로 흘러갈 경우 삼성은 두 가지 상황만 견제하면 된다.
하나는 검찰 대신 국회가 나서는 상황이다. X파일의 내용이 한국 사회의 커넥션 구조가 집약된 것이라는 여론에 밀려 국회가 국정조사에 나설 경우 삼성은 정치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비난 여론이 재점화 되는 일이다. 몸통은 고사하고 깃털조차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연출될 경우 국민의 비난 여론은 재점화될 공산이 크다. 이 상황은 검찰의 수사 착수 여부, 또는 수사 결과에 따라 연출될 공산이 크다. 이럴 경우 삼성은 바라지 않는 장기전에 휘말릴 수도 있다.
삼성이 모색할 수 있는 퇴로는 ‘꼬리 자르기’와 ‘성의 표시’다. 몸통인 이건희 회장을 온전히 보호하면서도 X파일 파문을 종료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제물’을 바쳐야 한다. 홍석현 대사는 그 첫 번째 대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학수 부회장도 홍석현 대사 뒤에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홍석현 대사 등을 떠밀면서 그의 파트너였던 이학수 부회장을 끌어안는 건 누가 봐도 모순된 행동이다.
홍석현 대사를 제물로 삼는 일은 기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중앙일보>는 오늘자 사설에서 홍석현 대사가 99년 김대중 정권의 괘씸죄에 걸려 감옥에 갔다왔다고 밝혔다. 97년 대선과정에서의 편향된 보도태도를 사실상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편향된 대선보도와 감옥행 사이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99년 3월 삼성은 <중앙일보>와의 관계를 끊었다. 한화가 <경향신문>, 현대가 <문화일보>와의 관계를 정리할 때도 꿋꿋하게 재벌신문 <중앙일보>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삼성이 김대중 정부 출범 1년 만에 형식에 있어서만큼은 관계를 정리했다. 그 뒤 삼성은 무사했고 홍석현 대사는 감옥에 갔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꼬리 자르기’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삼성이 홍석현 대사를 1순위로 해서 ‘꼬리 자르기’에 나선다 해도 남는 문제가 있다. 바로 시점이다. 홍석현 대사의 거취 표명이 조기에 이뤄질 경우 그 카드는 소화기가 아니라 불쏘시개가 될 공산이 크다. X파일의 내용을 인정하는 방증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석현 대사의 사퇴는 위법 행위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도의적 책임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날아온 소식, 즉 홍석현 대사가 거취를 고심하고 있긴 하지만 6자회담 일정 등을 고려해 당분간 사퇴 표명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보도는 이 맥락에서 읽는 게 맞다.
삼성의 제2의 퇴로, 즉 ‘성의 표시’는 대승적인 외양을 띠고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앞서 언급했던 MBC에 대한 소송은 이 국면에서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소송을 취하할 경우 ‘양보’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국민 사과문도 이 국면에서 발표해야 효과가 크다. 물론 그 내용은 ‘도의적 책임’이 돼야 할 것이다. 여기에다가 몇가지 사회에 대한 봉사 프로그램을 내놓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삼성이 헌법소원으로까지 끌고 간 재벌 계열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제한 규정, 또 금감위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재벌 금융사의 계열사 지분 5% 초과 보유분 처분 규정이 X파일 여파로 공론화 되지 않으면, 그래서 이건희 회장 일가의 그룹 지배권이 손상 받지 않으면 삼성은 ‘양보’의 폭을 넓게 잡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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