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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 파문이 제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제2라운드를 여는 호루라기 소리는 이것이다. “청와대는 정말 몰랐을까?”
제2라운드의 막을 연 곳은 <조선일보>다. X파일 존재를 최초로 공식 보도해 제1라운드의 막을 열었던 <조선일보>가 제2라운드마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조선일보>는 오늘자 1면 기사에서 국정원이 MBC의 X파일 내용과 동일한 CD 2장을 성문 분석한 사실을 전하면서 초점을 그 시점에 맞췄다. <조선일보>는 국정원이 CD의 성문을 분석한 시점은 올 1월이라면서 그 뒤에 이런 구절을 덧붙였다. “(국정원이 성문 분석한 시점은)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주미 대사로 내정 발표(2004년 12월 17일)된 직후이지만 아그레망(대사 파견 상대국의 동의)을 받아 정식 대사로 임명(2005년 2월 15일) 되기 이전이다.” <조선일보>가 주목한 바는 이것이다. “국정원이 ‘성문 분석’까지 할 정도였다면 청와대에 ‘도청 테이프’의 내용이 보고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액면 그대로 읽으면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만약 도청 테이프 내용이 청와대에 보고됐다면 그 시점은 성문 분석 직후, 즉 홍석현 주미 대사를 공식 임명한 올 2월 이전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문제가 있다는 게 <조선일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지만, 이런 지적은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 <조선일보> 스스로 밝혔듯이 대사를 임명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내정 사실을 상대국에 통보해 아그레망을 받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기간만 수개월이 걸린다. 따라서 대사 임명 절차는 대통령이 대사에게 임명장을 주는 시점이 아니라 내정 시점에 개시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의 인사는 국정원 CD 성문 분석 이전에 사실상 완료됐다고 봐야 한다. 청와대가 도청 테이프 내용을 보고받았다면 설령 아그레망을 받았다 해도 내정을 철회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할 순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가능했을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청와대의 사전 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조선일보>가 설정한 시점보다 더 멀리 되돌아가 짚어보는 게 오히려 현실적이다.
복기의 개시 시점은 두 개다. 하나는 문민 정부 시절이다. 지금까지의 보도를 종합하면 불법 도청팀 미림이 활동한 시기는 문민 정부 기간 내내다. 이 기간 동안 미림팀은 도청 내용을 축약해 상부에 보고했다. 따라서 도청 테이프는 몰라도 축약된 보고서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 정부에까지 이어져 열람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도청을 통해 확보한 정보가 주요인사 사찰 자료인 ‘존안 자료’에 기재됐을 경우 홍석현 주미 대사의 과거 행적을 청와대가 사전 인지했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존안 자료’는 지금까지도 인사 자료로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설을 사실로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는 지난 22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도청 내용의 존안 자료화 가능성은 없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미림팀이 확보한 도청 내용은 안기부장도 모른 채 오정소 당시 안기부 차장에게만 직보 됐으므로 존안자료로 재작성 됐을 가능성은 없다는 게 김기삼 씨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확인해야 할 사항은 하나다. 미림팀에 의해 오정소 차장에게 직보된 도청 내용이 청와대에 보고된 만큼 그 기록이 청와대에 남아있을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조선일보>가 어제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림팀의 도청 보고서는 오정소 차장에 의해 이원종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등에게만 제한적으로 전달됐다고 한다. 이는 청와대의 공식 라인이 아니라 사선을 통해 보고가 됐다는 의미로 청와대의 캐비닛에 도청 보고서가 보관됐을 리 만무하다는 얘기다.
더구나 문민 정부는 퇴임과 동시에 청와대 자료 대부분을 소각 처리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바까지 있다.
복기 개시의 두 번째 시점은 99년이다. 오마이뉴스가 일보를 전했고, 삼성이 이른바 ‘대국민 사과문’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전 미림팀원이 99년 삼성에 도청 테이프를 돈 주고 살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삼성은 이 제의를 거절하고 오히려 국정원에 신고했고, 국정원은 진상 조사에 들어가 도청 테이프 제작과 유출 경위를 조사한 바 있다.
따라서 이 때의 진상조사 결과가 청와대에 보고돼 그 내용이 참여 정부에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전 미림팀원이 퇴직 때 도청 테이프를 갖고 나와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려 했다는 사실은 국정원으로선 치부 중의 치부다. 전직 직원이라 해도 재직 때 얻은 정보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한 국정원법을 정면으로 어겼는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민간 기업의 신고를 받고서야 부랴부랴 진상조사에 나선 게 무슨 큰 자랑거리라고 청와대에 보고를 하겠는가.
더구나 도청 테이프 내용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도 포함돼 있다. 설령 국민의 정부가 국정원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았다 해도 전임 대통령의 치부를 밝힐 수 있는 정보를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을까?
현재로선 청와대가 X파일에 기재된 홍석현 주미 대사의 과거 행적을 사전에 인지했다고 볼만한 정황 증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잠정 결론이 청와대의 주미 대사 임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청와대의 사전 인지 여부를 가리는 대상이 X파일인 것만은 아니다.
홍석현 주미 대사는 97년 대선 때 <중앙일보>의 ‘이회창 후보 편들기 보도’의 최고 책임자였다. 97년 초에 실시된 신한국당 후보 경선 때 이회창 후보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 경선전략 문건을 만들도록 지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또 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에게 대선 자금을 건넨 사실이 99년에 천용택 당시 국정원장에 의해 확인된 바도 있다. 그뿐인가. 홍석현 주미 대사는 보광 그룹 탈세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를 인정받은 바도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이미 언론에 의해 보도된, 공개된 것이었다. 청와대가 사전 인지를 하고 말 것도 없는 기초 정보였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홍석현씨를 주미 대사 임명을 강행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청와대를 향해 먼저 따져 물어야 하는 건 X파일을 사전에 인지했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왜 홍석현 대사를 무리하게 임명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일찌감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북핵 문제가 불거져 미국 조야에 대한 접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에서 홍석현 대사만큼 미국 내 인맥이 풍부한 사람이 없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었다.
“상황이 절박하니까 과거는 묻지 말아주세요” 식의 청와대 논리가 지금에 와서 청와대를 옥죄고 있다. 청와대 논리대로라면, X파일을 통해 밝혀진 홍석현 주미 대사의 과거 행적은 임명 당시 읽었을 그의 과거 행적 보고서에 몇 줄을 더 하는 ‘플러스 알파’에 불과하고, 청와대가 직접 홍석현 주미 대사를 경질하는 걸 면구스럽게 하는 요소다. 그래서 청와대는 시간을 끌면서 홍석현 주미 대사의 자진 사퇴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어제의 언명, 즉 홍석현 대사의 경질 요구에 대해 “공개되지 않은 다른 범죄행위와의 형평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논리가 발생할 수 있다”며 비껴간 것도, 자르자니 멋쩍고 안 자르자니 뒷감당이 걱정되는 청와대의 곤혹스런 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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