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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함께 한 강상기씨
부인과 함께 한 강상기씨 ⓒ 정종인
이제 그만 쉬고도 싶다. 지나온 세월. 그러나 켜켜이 쌓인 추억을 정리하며 남은 인생 이제는 젊은 시절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고 싶다. '현대판 방물장수' 강상기(54)씨.

고향인 전북 부안 줄포를 떠나 서울행을 감행해 상경 첫날부터 '눈뜨고 있어도 코베간다'는 서울에서 사기를 당하고 빈털털이가 되기도 했던 강씨. 중학교 2년 중퇴 학력이 전부지만 강씨는 서울에서 자신의 표현대로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35가지의 서로 다른 직업을 체험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직 종착역은 멀었지만 중간 간이역에서 거칠게 달려온 인생의 땀방울을 닦고 있는 '인간승리'이자 '고난을 극복한 현대판 방물장수' 강상기씨의 애환은 심해의 바다다.

짐발이 자전거 이후 장만한 자신의 애마인 트럭에서 포즈를 취한 강씨
짐발이 자전거 이후 장만한 자신의 애마인 트럭에서 포즈를 취한 강씨 ⓒ 정종인
신용과 정직으로 일군 인간 드라마

"뚫∼어∼"
"동동구루무∼ 동동구루무(둥 둥)."
"곤로나 심지 갈아요∼"
"아이롱 다리미를 아시나요."

'현대판 방물장수' 강상기씨의 서울 상경기는 삶의 비애는 물론 사선을 넘나드는 드라마가 있다. 이발소에서 손님 머리를 감기는 '시다'부터 '동동구루무' 장수, 막힌 굴뚝을 뚫는 노가다, 아이롱 다리미 장사 등 정확히 35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치열한 삶과의 전쟁을 펼쳤다.

고물장수를 하다 우연한 기회에 주류도매상으로 '고생 끝'이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의 자전거에 실린 술병이 장난하던 아이의 머리에 떨어져 20여일 만에 그 아이가 숨지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리기도 한 강씨. 좌절의 늪을 헤매며 뚝섬 인근 답십리 판자촌에서 2홉들이 소주 10병과 수면제를 마시고 자살을 결행했지만 다행히 사글세방 주인에 발견돼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눈뜨고 코베가는 서울

죽순(竹筍) 때부터 온갖 풍상을 맞은 대나무는 마디가 많고 불규칙하다. 당연히 좋은 재료를 구하는 이에게는 천덕꾸러기지만 모진 풍파와 거친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버티어 내는 지혜가 마디에 숨어 있다.

'현대판 방물장수' 강상기씨의 고향은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의 작은마을이다. 어린 시절 '밥 먹을 만큼'은 살 정도로 평탄한 가정에서 태어난 강씨는 급작스런 몰락으로 유년 시절부터 남의 집일을 거들어야 주린 배를 채울 정도로 빈곤에 허덕여야 했다.

농촌에서 더 이상 희망의 빛을 발견하지 못한 강씨는 '야반도주'을 결행했다. '탈출'을 결심하고 보내기 품팔이를 하며 모은 1600원정도의 돈이 그의 전대에 감추어져 있었다. 줄포에서 출발해 정읍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촌놈 상경기'에 돌입했다.

무더위를 피하는 강씨의 모자 발명품(?)
무더위를 피하는 강씨의 모자 발명품(?) ⓒ 정종인
취업 미끼로 호의 베푸는 청년에 사기 당해

첫 번째 시련이었다. 열차 안에서도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농촌 선배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전대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지만 불행은 다른 곳에서 다가왔다. 열차가 충남 신탄진역에 다다를 무렵 20대 청년이 다가와 자신을 모 업체에 다니는 인사 담당자라고 소개했다. 서울역에 도착해 식사 대접을 하는 등 그가 호의를 베풀자 순진했던 강씨는 자신이 가진 돈을 그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 청년은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당시로는 큰 돈인 1000원 정도를 빼앗겨 버린 강씨는 서울역 부근에서 낮에는 이발소 시다로, 밤에는 껌팔이로 눈물겨운 서울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강씨는 고물장사로 업종을 전환한 후 74년 한반도를 강타한 유류 파동으로 인해 유리값이 폭등하자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고물상으로 큰 돈을 번 후 주류업체의 권유로 시작한 주류도매업도 승승장구했으나 배달 중 사고로 어린아이가 병 파편에 머리를 다쳐 병원을 전전하다 숨을 거두자 합의금으로 전 재산을 날려 버렸다. 구속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자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늦둥이 하은이와 함께. 오진으로 인해 임신 사실을 3개월이 지나 알았을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넘친 강씨의 보배다.
늦둥이 하은이와 함께. 오진으로 인해 임신 사실을 3개월이 지나 알았을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넘친 강씨의 보배다. ⓒ 정종인
희망 찾아 마산행 결심

인생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강씨는 주변의 권유로 마산행을 결심한다. 수출자유지역이 있는 마산이 막노동을 하기에는 일거리도 많고 조건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마산 시절 강씨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들과 수출자유지역 공원으로 나갔다 부인이된 김화숙씨를 만나는 행운을 잡는다.

하지만 부인 김씨의 부모들은 '전라도 출신으로 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 강씨를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도망자'였다는 강씨의 말대로 부인 김씨를 데리고 장인 장모가 찾을 수 없는 정읍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가 79년 칼바람 부는 겨울이었다.

"신용과 정직이 저의 전 재산입니다. 고생은 존재의 의미인 만큼 소외된 이웃에게 되돌려 주며 남은 생애를 살아가겠습니다. 거상 임상옥이 되는 게 어린 시절 꿈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현대판 방물장수' 강상기씨에게는 꿈이 있었다. '거상(巨商)' 임상옥에 관한 이야기를 조부에게서 들은 강씨는 자신도 한반도를 호령하는 큰 장사꾼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고 생계마저 어려움을 겪은 강씨는 날품팔이를 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탓에 군을 제대하고 직장에 취업한 아들에게 쏟아붓는 정성이 남다르다.

동네 모정에 앉아 이웃들과 지난 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네 모정에 앉아 이웃들과 지난 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 정종인
정읍에서 자전거로 방물장사 시작

서울에서 마산으로 이주한 강씨는 서울보다 건설 경기가 활황세였던 마산에서 부인 화숙씨를 만나면서 부터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난파선이 아담한 항구에 정착하듯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됐다.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 마산시절 건축업자였던 이희백 사장을 강씨는 '은인 중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산을 떠나며 먼 훗날 성공하면 비단 한복이라도 선사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장인·장모의 눈을 피해 강씨가 화숙씨를 데리고 정읍에 정착한 것이 그이 나이 31세가 되던 82년. 그해 강씨는 마산에서 노가다를 하며 적금한 돈을 찾아 '방물장수'가 됐다. 당시 돈으로 2800원을 주고 큰맘 먹고 산 짐발이 자전거는 그에게 최고급 승용차보다 값진 의미였다. 아직도 자전거를 산 날 괜한 기름칠을 하며 아내와 함께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렸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강씨는 고백한다.

전셋집·전화 장만이 최고의 꿈

방물장사를 시작한 강씨에게는 세가지 꿈이 있었다. 남들처럼 자신의 전화번호를 갖고 장사를 하고 사랑하는 아내 화숙씨를 전셋집에서 생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2국에 8374'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읍시 전역을 돌며 단골 거래처를 만들어 가던 강씨가 자신의 소망대로 처음 받아본 전화번호다.

그것도 자신이 전화국에 신청해서 받은 게 아니라 단골거래처 주인이자 학교 선생님 부인이었던 50대 여자에게 '일수'를 소개했으나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한 전화기였다. 무난히 성장해 가던 강씨는 '일수 파동'으로 이자까지 물어주며 100여만원을 털리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므로 흔들리지 않고 재기에 성공했다.

어려운 여정을 지탱해 온 '의지의 한국인' 강상기씨는 복날이나 명절은 물론 수시로 인근 경로당을 비롯 아버지 같은 어르신들이 있는 곳이면 생필품이나 막걸리, 안주를 들고 찾아 나선 지도 오래다. 정읍시상동자율방범대원으로 사회에 봉사도 아끼지 않고 있는 강씨는 IMF로 좌절의 늪을 헤맬 때는 '늦둥이'인 하은(8·여·정읍서초1)이가 태어나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강씨의 피로를 풀어주는 청량제인 하은양을 임신한 후 내과병원의 오진으로 임신 사실을 모른 채 부인 김씨가 봉사활동과 투약을 계속해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막내딸과 부인 김씨도 생사 넘나드는 '고비'

지난 달에는 축농증수술 후 지혈이 되지 않아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부인 김씨 곁에서 극진한 병간호를 한 강씨는 "마산에서 야반 도주한 후 부족한 나를 만나 죽도록 고생한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안쓰럽다"며 "진 빚이 많기에 병실에서 간호에 열중했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취재 후기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온 강상기씨의 인터뷰를 마치고 올해로 18년째 기자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겪어왔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전남매일기자시절 5·18광주민주화운동 영정든 '꼬마상주'를 찾아내 특종 보도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순교자 같은 그의 인생을 나의 졸필로 어떻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해 한편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으며 이것도 고민이었다. 기사를 쓰며 불면의 밤을 보내본 것도 어찌 보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소설책 몇 권쯤은 될 거라는 생각을 갖기도 하지만 노트북을 열기전 고민의 마침표를 찍었다. '세상을 살면서 강씨가 흘렸던 눈물속에 남은 나의 인생을 투영하며 살자' 자정이 넘은 시간 하얀 밤하늘에 강씨의 자서전(?)을 쓸 수 있었다.
강씨와 피를 나눈 형제만큼 우정이 두터운 송병규(49·금강수퍼운영)씨는 "같은 도매업에 종사하면서도 의형제처럼 유통 정보를 나누고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강씨는 신용과 정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표상"이라고 자랑했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용을 지키기 위해 매일 거래처를 순회하는 '성실파' 강씨는 "근면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며 "작은 어려움에 처해도 스스로 해결하는 진취적 사고와 행동하는 지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씨의 명함에는 '신용과 정직이 재산입니다'라는 당찬 문구가 자리잡고 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때때로 선천적인 다혈질로 인해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강씨는 겨울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인동초처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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