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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재훈 장편소설 <바다와 커피> 앞표지
ⓒ 늘푸른소나무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글을 쓰느라 밤샘할 때 과자와 더불어 커피를 여러 잔 마실 때가 많고, 식후에도 꼭 커피를 마셔야만 식사를 마친 기분이 든다. 우유를 마셔도 꼭 커피우유를 마시고 빙과류를 먹어도 꼭 커피가 들어간 걸 먹는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고만 말할 뿐 커피 마니아를 자처하지는 못한다. 그저 구수한 보통 커피만 좋아할 뿐, 향(香)이니 뭐니 따져 가며 마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숭늉이나 보리차도 좋아하는데, 구수한 보통 커피를 좋아하는 것과 아마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숭늉이나 보리차나 싸구려 커피나 구수함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소설 내용 속에 커피가 들어가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소설 제목에 ‘커피’가 들어가는 일이란 흔치 않다. 월간지 <커피>도 있고 <커피 한 잔의 명상으로 10억을 번 사람들> <모닝커피의 기적> <커피가 식기 전에 회의를 끝내라> <커피하우스 창업하기> 등 처세술이 담겨 있거나 실용적인 장르의 책도 여러 권 눈에 띄지만 ‘커피’가 제목에 들어간 소설은 오직 시인 원재훈의 <모닝커피>와 <바다와 커피>뿐이다.

▲ 원재훈 장편소설 <모닝커피> 앞표지
ⓒ 생각의나무
일산의 커피 전문점 ‘코델리’의 야외 탁자에 앉아 있는 원재훈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는 소설가 이순원은 <바다와 커피>를 음미하고 나서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전략) 원재훈의 <바다와 커피>를 읽다 보면 우리의 사랑이거나 인생이 커피 한 잔이 만들어져 채워지고 또 잔이 비어 가는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안에 애틋함과 안타까움과 넘침과 아쉬움의 미련이 다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사랑의 은유이기도 하고, 인생의 은유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 소설을 통해 원재훈에게 다시 배운다.
-<바다와 커피> 271쪽에서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그리운 102> <딸기> 등의 시집을 낸 시인 원재훈은 나와 경희중학교 동기생이다. 3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다. 하지만 만나기 전에는 시인 원재훈이 그 원재훈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느 날 그가 시인 박해석과 서울문화사에 근무할 때 나의 소설 출판 계약 건으로 만났다가 점심을 함께 한 뒤 커피를 음미하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다 싶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죠?”
“글쎄요, 그렇기도 한 듯 한데…….”

하나하나 연고지를 짚어나가다 보니 우리는 중학교 동기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중학생 때 문학도인 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듯이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는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고양시 관산동 통일로변의 사슴 키우는 집에서 셋방살이하며 소설을 쓸 무렵, 위문을 왔을 때도 들판을 산책했을 뿐 커피 전문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만한 커피 마니아인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 2002년 12월에 장편소설 <모닝커피>를 내었을 때도 “서정적인 분위기의 소설을 내었나보다” 생각했을 뿐 그가 그토록 철저한 커피 마니아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2년 뒤인 지난해 12월에 또다시 제목에 ‘커피’가 들어간 장편소설 <바다와 커피>를 내었으니, 그제서야 그가 박식한 커피 마니아인 걸 짐작할 수 있었다.

▲ 커피를 음미하는 시인 원재훈
ⓒ 원재훈
<바다와 커피>는 커피 묘사에서 작가의 육화(肉化)된 염력(念力)이 느껴지기 때문에 커피 박사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원재훈처럼 서정적인 가슴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쓸 수 없는 소설이다. 일산에서 섬까지…. 섬 속의 시어(詩語) 같은 사람들, 다빈과 누리, 사랑, 달빛과 이별, 등대와 파도, 풀과 나무와 모래, 그리움이며 훈훈함이며 한(恨)이며 심지어는 사람의 냄새까지 온통 담고 있는 커피 향기….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달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내내 엎드린 채 숨죽여 읽었으며, 결코 이제까지 읽었던 소설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속독(速讀)도 불가능했다. 이 소설 속의 자연과 인물과 모든 사물은 모두가 시어였으며, 소설 한 문장 한 문단, 나아가서는 소설 전체가 밤하늘의 별밭 같은 은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들이 커피를 마시며 아름다운 언어를 나누고 있는 분위기였다. 원재훈은 발문을 이렇게 썼다.

‘푸른 별이 내려와 커피가 되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듯 사랑을 나누고 별이 되어 캄캄한 우주로 떠난다. 나는 그녀에게 삶의 위안이 되는 한 잔의 커피가 되고 싶었다.’


<바다와 커피>를 읽으며 나는, 커피가 단지 구수함뿐만이 아니라 청초(靑草) 향기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덧붙이는 글 | <바다와 커피> 원재훈 지음/2004년 12월 25일 늘푸른소나무 펴냄/190×135mm 하드커버/272쪽/책값 85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바다와 커피

원재훈 지음, 늘푸른소나무(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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