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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방침이 선 것 같다. <동아일보>는 검찰이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의 내용을 수사하지 않기로 최종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검찰의 ‘내용 수사 불가’ 방침의 근거는 법 논리다. “도청 테이프는 불법 증거이므로 이를 근거로 수사에 나서는 것도 불법”이라는 것이다. 이미 예견됐던 논리이기에 그게 관심사는 아니다.

시점이 절묘하다. 오늘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예정돼 있는 날이다. 국정원이 불법 도청 행위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MBC 이상호 기자는 오후 2시 검찰에 출두한다.

국정원의 중간조사 결과는 당연히 불법 도청 행위에 맞춰 발표될 것이다. 사실 확인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 <중앙일보>는 국정원이 오늘 “휴대전화 불법 감청을 실시했는지 여부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국정원의 중간조사 결과 발표는 여론의 관심사를 이동시킬 것이다. 도청팀의 불법 행각 뿐 아니라 불법 도청팀 구성을 지시한 최고위선이 누구인지, 불법 도청 내용이 어떻게 악용됐는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것이다.

만에 하나, <중앙일보>의 보도대로 휴대전화 불법 감청 사실을 국정원이 인정할 경우 일파는 만파가 될 것이다.

이상호 기자의 검찰 출두가 어떤 파장을 빚을지는 미지수다. 검찰은 일단 이상호 기자를 참고인 신분으로 부르지만 수사과정에서 피내사자, 더 나아가 피의자 신분이 될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 검찰은 어떻게든 이상호 기자의 면책 사유를 깨야 한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례를 원용하면, 이상호 기자가 면책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 또 하나는 불법 도청 테이프 입수 과정이 정당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검찰도 알 것이다. 따라서 검찰은 후자, 즉 불법 도청 테이프 입수 과정을 집중적으로 캐물으려 할 것이다.

오늘과 내일 전개될 상황은 검찰의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 수사 불가’ 방침에 대한 토론의 집중도를 현저히 약화시킬 것이다. 검찰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검찰의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 수사 불가’ 방침을 이해 못할 바도 없다. 법치의 최후 보루라는 검찰이 법 테두리를 벗어나 수사하는 건 어렵다. 여론과 상충되는 점이 있긴 하지만 법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검찰의 입장을 무조건 배척할 일도 아니다.

검찰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법 논리만 따른다면 그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일단 이해의 대상으로 접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검찰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볼 수가 없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검찰이 ‘수사 불가’ 방침을 확정한 대상은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이다. 이른바 ‘이상호 X파일’은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검찰 내에서는 ‘X파일’ 내용에 대한 수사가 가능하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주장하는 검사들은 “불법 도청 자체가 아니고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근거로 수사하는 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고 한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니까, 또 시민단체가 고발해 온 사안이므로 불법 증거 시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의문은 이 지점에서 싹튼다. 검찰이 단호하게 법 논리를 내세우면서도 유독 ‘X파일’에 대해서만 좌고우면 하는 이유가 뭘까? 일단 진단할 수 있는 건 현상의 차이다.

‘X파일’의 내용은 이미 공개됐다. 이로 인해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 혐의, 즉 업무상 배임, 횡령, 뇌물 수수 혐의가 제기됐다. 어차피 인지한 범죄 행위를 마냥 피해가기엔 검찰이 안아야 할 부담이 적지 않다.

반면에 도청 테이프 274개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274개의 도청 테이프에 범죄 행위가 포함돼 있더라도 그건 공개된 게 아니다. 따라서 국민의 비난 여론, 수사 요구 여론도 구체적일 수 없다. 검찰로서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검찰의 이런 이중 대응 태도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 가운데 일부의 내용을 누군가가 시중에 흘린 다음 수사를 요구하면?

현재로선 말 그대로 가상 상황이지만 현실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한겨레신문>은 99년 당시 국민의 정부 핵심 실세들이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미림팀’의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여럿 현존해 있다.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따라 내용 일부를 시중에 흘리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미림팀장이었던 공운영씨, 그리고 익명의 미림팀원은 97년 대선 당시 불법 도청 내용 일부를 이회창 후보 쪽에 넘겨줬다고 실토한 바 있다. 2007년 대선 과정에서 불법 도청 내용이 악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고백이다.

만약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면 검찰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 때마다 개별 차원에서 수사에 임할 것인가?

지금 검찰이 찾아야 하는 해법은 ‘알렉산더의 칼’이어야 한다. 상황은 제로섬 게임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상황은 전부 아니면 전무를 요구하고 있다. 들춰내든 묻고 가든 그건 ‘전부’여야지 ‘일부’가 돼서는 안 된다. 검찰이 이에 대해 입장을 빨리 밝혀야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특검제와 특별법 제정 문제가 가닥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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