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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호 전경
의암호 전경 ⓒ 최삼경
또한, 호반의 도시라 불리는 춘천의 풍광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인 낚시에도 조예가 깊어 만만치 않은 조력을 나부끼며 뭇 조사들의 시새움을 받는 관록을 자랑하고 있으니, 그 오랜 세월 낚음의 바늘에 걸려 번쩍이는 것이 바로 이 <황금비늘>이다.

소설은 이외수의 거개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년’의 눈에 비친 살풍경한 세상이 배경으로 되고 있다. 겹겹이 첩첩히 쌓인 부조리함과 불합리 속에 견고히 자리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심장부 서울에서 주인공인 소년이 ‘탐욕이 멈추지 않는 세상의 습성’을 한탄하며 일명 ‘재산분배업’에서 혁혁한 명성을 쌓다가 은퇴한 고수에게서 공수(空手)기법을 배우는 과정은 흡사 소림사의 실전(失傳)무공수련과정을 떠올릴 정도로 치밀하게 전개된다.

'예감으로써 그날의 재수를 알며, 육감으로써 고객의 빈부를 알며, 쾌감으로써 재물의 가치를 알아야' 하는 공수 소매치기 요원들은 항시 수입의 일정부분을 사회에 헌납하며 일가족의 생계비나 병원비등은 지체 없이 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 그들의 대의명분의 삼엄함이 또한 이와 같은 도도(盜道)에 이른 것이었으리라.

물고기는 눈을 뜬 채 잠을 잔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서울생활을 접은 소년이 춘천 서면에 내려와 본격적으로 낚시를 배우며 할아버지에게서 세상을 읽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어느 지인에게 세상만물의 모이고 흩어짐을 얘기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돈은 인류에게 잘못을 자행한 바 없으나 단지 그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할아버지의 궁색한 처소에는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중견 정치인부터 기업가, 시인, 이름 없는 사람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할아버지는 ‘우주만물은 어떤 것이든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라며 모두를 아우른다. 이러한 언급은 어쩐지 ‘물의 철학’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로만 흐르며, 굳이 그 흐름을 애써 바꾸지 않지만 종내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화합하게 되는 물의 자명한 이치.

중도 부근
중도 부근 ⓒ 최삼경
예로부터 산을 좋아하는 자는 어질고 물을 좋아하는 자는 현명하다는 얘기가 있듯이 어쩌면 강원도, 춘천사람들의 순후한 인심과 시원적 낭만성 같은 것은 풍부한 수량과 아침저녁으로 자욱하게 피워 올려지는 안개를 닮은 것은 아닐까? 세상이 자본과 경쟁으로 흉흉해질수록 이러한 점은 더더욱 미덕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이 괜한 촌사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춘천이라는 도시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어항 속으로 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렇게 하나의 도시를 뭉뚱그려 커다란 유기체로 본다면 누가 자신의 생명에 스스로 칼질을 하는 해악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대자연의 눈으로 보면 만물에게는 문명이 가파르게 그어 놓은 일등, 꼴찌의 개념이 없다. 경쟁과 투쟁의 시각을 접고 모든 존재의 가치는 조화롭고 동일하다는 인식에 이르면, 누구든 소양호 상류 어디쯤에 존재한다는 무원동(霧源洞)에서 유유한 헤엄을 치고 있는 금선어(金仙魚)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도 삭막한 도심의 일상으로 지쳐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 춘천에 와서 이미 각자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향을 찾아보라는 당부도 아울러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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