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금메달이 있는 것 확실하나?"
육영재단측(이하 재단) "분명히 있다."
기자 "어디에 있나?"
재단 "보안상 알려줄 수 없다."
기자 "공개할 수 없나?"
재단 "이사장님 결재가 있어야 한다."
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능동의 육영재단 사무실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다. 지난 79년 고 손기정 선수가 육영재단에 기증한 기념물 200여점 중 베를린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의 행방이 묘연해졌기 때문.
이날 재단 사무실이 있는 어린이회관은 금메달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취재진으로 북적거렸고, 기자들과 재단 관계자들은 '있냐"-"있다", "공개하라"-"할 수 없다"의 지루한 공방을 반복했다.
재단은 "금메달과 월계관 등 중요물품은 도난과 훼손의 염려 때문에 별도의 보관실에 보관 중"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오후 어린이회관을 찾은 강형구 손기정기념재단 이사장과 이준승(손 선수의 외손자) 사무총장의 거듭된 공개 요구에 대해 재단은 "박근영 이사장의 결재가 필요하다"며 "기다려 달라"는 답변만 내놓았다.
자연히 금메달 공개를 놓고 박근영 이사장의 입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재단은 "이사장이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며 "빠른 시일 내에 이사장, 사무국장, 이사진들과 회의를 거쳐 공개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재단측은 이날 "금메달은 보관 중에 있다"는 보도자료만 배포한 채 '국토순례단 성추행 관련 대책회의'를 위해 오후 사무실을 떠났다.
금메달 공개를 놓고 박근영 이사장의 답변은?
재단의 한 관계자는 "금메달 논란은 공개만 하면 끝이라 큰 문제가 아니다"며 여유를 보이면서도 보도에 대한 박 이사장의 반응을 묻자 "이사장님께서 근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셔서 정식 보고는 드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왜 금메달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이사장님이 언론에 대한 실망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국토순례단 성추행 사건 보도에 대해 "전후 상황은 다 자른 채 이사장의 말 한 마디만 너무 부각됐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육영재단측은 박 이사장의 심기를 걱정해 여론이 집중된 금메달 사건에 대해 대책회의조차 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연이어 언론에 오르내린 박 이사장의 언론 기피증을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박 이사장은 최근 국토순례단 성추행 사건과 관련 "임신이라도 했냐"는 발언과 학부모들과의 이전투구 내용이 보도되는 바람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7월 박 이사장은 관할 교육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어린이회관 예식장 내부 임대사업을 해 해임될 위기에 직면했고,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박 이사장은 관련 법안에 대한 위헌 소송을 통해 가까스로 이사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 이사장은 '금메달 공개'의 결정권을 쥐고서도 유족의 방문에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아 '금메달이 없다' '이사장 사무실 벽에 월계관만 걸어뒀다'는 등의 의혹만 증폭시켰다.
의혹 자초하는 육영재단
금메달 자체에 대한 박 이사장의 '심기'는 애정이라는 것이 재단의 설명이다. 재단 관계자는 "지난 96년 재단에서 보관해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칼과 친필 휘호를 도난당한 적이 있어 박 이사장이 더욱 보안에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이사장은 지난 7월 언론 인터뷰에서 "손 선수의 유물은 우리나라의 큰 보물이다, 그러기에 누가 와서 봐도 감탄할 수 있을 정도의 전시 디자인을 선보여 최고의 상태로 보존할 것이다"며 '손기정 기념관' 재개관 프로젝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현재 공개를 하지 못하는 것은 재정상의 이유로 금메달과 월계관을 전시할 시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재단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품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 박 이사장이라면 외할아버지의 유품을 보고싶은 이준승씨의 심정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씨는 "메달을 직접 확인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겠다"며 "기증 당시 '재단이 아닌 정부에 기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재단으로부터 할아버지의 유품을 반환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겠다"며 재단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박 이사장이 언론을 회피한 채 금메달 의혹에 대해 속시원한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박 이사장과 재단은 '금메달 공개 거부'라는 불미스러운 이유로 또 다시 자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언론에 이름을 올리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