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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봉 면앙정으로 오르는 멋스런 돌계단.
제월봉 면앙정으로 오르는 멋스런 돌계단. ⓒ 곽교신
면앙정이 서있는 제월봉은 가사 문학의 진정한 대가 송순 선생의 고향 뒷산이다. 면앙정으로 오르는 끝이 휘어진 돌계단은 탈속(脫俗)의 길인 듯 무더위에도 차분하다. 정자가 세워질 때부터 있었다는 돌계단은 한 계단씩 밟아 오를 때마다 한 걸음씩 선경으로 가까이 가는 듯하다. 일단은 그렇다.

'굽어 땅을 보고 우러러 하늘을 본다'는 속뜻을 담은 "면앙(免仰)"은 송순 선생이 이 정자에 담고 싶었던 품격을 짧게 요약한다. '놀자고 지은 것이 정자일 뿐'이라고 작심하고 떠난 길이지만 면앙정에선 그 작심의 꼬리를 약간은 내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아무리 배틀어진 시각으로 보려도 당호 면앙정의 뜻은 맑은 하늘같다.

굽어 보고 우러러 보기 알맞도록 면앙정이 놓인 위치는 지형상으론 훤히 트였다. 그러나 실제론 정자 앞 우거진 대나무 사이 겨우 터진 한 곳으로 들판이 빠꼼히 보이니, 송순 선생의 뜻대로 면앙정의 진면목을 보고싶은 답사객을 위해 시야를 터주는 관리상의 배려가 아쉽다.

아름다운 언어의 창고 면앙정가

대마무 사이로 겨우 보이는 들판. 이렇다면 정자가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좌우 대나무 가지를 쳐낸다면 얼마나 눈이 시원할까.
대마무 사이로 겨우 보이는 들판. 이렇다면 정자가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좌우 대나무 가지를 쳐낸다면 얼마나 눈이 시원할까. ⓒ 곽교신
이런 <면앙정>에서 지은 <면앙정가>는 귀절귀절에 담긴 언어 역시 향기롭다. 송강에 의해 가사가 꽃을 피웠다고 보아 가사문학관을 송강의 흔적이 느껴지는 근처에 세웠으나 실은 면앙정 근처에 세웠어야 옳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송강 가사들은 문학성이란 측면에서 송강의 스승이 지은 <면앙정가>와는 격이 한참 다르다.

그러나 면앙정가도 놀자고 지은 정자에서 지어진 것이니, 세상이 내 손 안에 있는 듯 호방한 정자 문학의 틀을 벗어나진 못한다.

술이 닉어거니 벗지라 업슬소냐. 블내며 타이며 혀이며 이아며 온가짓 소래로 醉興(취흥)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이시며 시람이라 브트시랴. 누으락 안즈락 구브락 져츠락 을프락 파람하락 노혜로 놀거니 天地(천지)도 넙고넙고 日月(일월)도 한가하다.

(술이 익었으니 벗이 없을까. 부르게 하고 타게 하고 안(기)고 흔들며 온갖 소리로 술맛을 돋우니, 근심이나 시름이 있을까. 누웠다가 앉았다가 구부렸다 젖혔다가 읊었다가 휘파람 불며 거침없이 노니 세상도 넓고 세월도 한가하다)


이 부분은 생략법에 의한 문학적 카타르시스가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반듯한 모범생을 키워내야 할 임무가 주어진 고등학교에서는 '(노래를)부르게 하고 (악기를)타게 하고'와 같이 생략법을 무참히 깨버린 채 가르쳤다. 이것은 작가 송순의 창작 의도를 노골적으로 무시한 저작권 침해로까지 여겨진다.

오늘 처음 만난 당신이지만 내 사랑인걸요, 헤어지면 남이 되어 모른 척하겠지만---, / 장윤정의 노래 <어머나>에서.

가요 <어머나>의 가사와 면앙정가의 윗 귀절을 품이나 격이나 따로 놓을 일이 하나도 없다. 면앙정가의 분위기로 미뤄보아 송순 선생도 오백년만 늦게 태어나셨다면 '어머나'를 좋아하셨을 것 같다. 가요나 가사나 격이 다를 일이 없는 것이다. '어머나'는 현대의 유행가고 가사는 오백년전의 유행가였을 뿐이다. <면앙정가>는 책엔 <면앙정장가>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쓴 시가에서 지나치게 품위를 요구하는 게 시작부터가 틀린 일이다.

방에서 내다 본 누마루 남쪽. 부르게 하고 타게 하고 안(기)고 흔들며...
방에서 내다 본 누마루 남쪽. 부르게 하고 타게 하고 안(기)고 흔들며... ⓒ 곽교신
어쨌거나, 작심하고 6년여 만에 다시 찾은 면앙정 마루에 앉아 고치고 또 고쳐 생각해봐도, '부르게 하고 타게 하고 안기고 흔들며 온갖 소리로 술맛을 돋는다'거나 '누웠다가 앉았다가 구부렸다 젖혔다가 - 거침없이 노니'가 도무지 "미성년자관람불가"로만 보이니, 이 또한 더위 탓인가 아니면 기자의 정신 세계가 태생부터 삐딱해서인가.

조선왕조의 육법전서인 경국대전에는 '정자에서의 미풍양속 규제에 관한 시행령' 쯤으로 이름 붙일 그 어떤 비슷한 법조문도 안보인다. 처첩이 공존하던 때이니 모범생의 개념도 지금과 달랐다. 벗들과 꽃같은 기생과 함께 맛나게 익은 술에 취해 마시고 놀며 시 좀 짓다가 남여상열지사 좀 진하게 있었던들 큰 흠이 아니었을 시절이다.

정자와 정자 문화를 고매한 선비 정신의 집결체로 보는 한 모범생적인 해석은 난센스다. 정자 건립의 일차적 목적이 '노는 것임'을 인정할 때 가사의 이해도 국어 교과서 이래 강요되어온 해석의 굴레를 비로소 벗어난다. 가사를 위대한 국문학으로 인정하면서 해석은 틀에 묶어 놓는 것은 억지다. 예술 행위의 기본인 무한한 자유로움은 창작 뿐만 아니라 해석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던 중종 때 급제한 뒤부터 임진왜란 전 선조 때까지 네 임금 아래서 무난히 관직을 마친 것을 두고 '대인관계가 무척 원만했던 송순'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더구나 송순 선생이 면앙정을 세운 것은 흔히 생각하듯 관직 퇴임 후가 아니라 그의 관료생활 51년 중 초반에 해당하는 경력 15년 무렵이다. 그의 말년 시조에 있는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란 귀절은 면앙정을 지었을 무렵의 관직 경력 15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래도 역시 아름다운 면앙정

돌계단을 다 올라간 바깥마당에서 보면 살짝 틀어 앉힌 그것이 또 멋스러운 면앙정.
돌계단을 다 올라간 바깥마당에서 보면 살짝 틀어 앉힌 그것이 또 멋스러운 면앙정. ⓒ 곽교신
그러나 요즘 말로 '그까이꺼' 좀 어떠랴. 면앙정은 담양 주변의 정자 중에선 가장 품격이 있어보이는 것을. 살짝 왼쪽으로 틀어올린 돌계단을 올라가면 또 살짝 왼쪽으로 틀며 정자가 앉아 있다. 그것도 살짝 단을 쌓아놓아서 몇 계단 또 올라가야만 정자 마당에 이르는 구조로 지었다.

이 "살짝" 이란 구조 개념은 <면앙정가> 곳곳에도 시적 은유로 나타나니 예를 들면 이렇다.

너라바회 우해 松竹(송죽)을 헤혀고 亭子(정자)랄 언쳐시니
(넓은 바위 위에 소나무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얹었으니),

어즈러온 기러기난 므스거슬 어르노라 안즈락 나리락 모드락 흣트락 蘆花(노화)를 사이 두고 우러곰 좃니난뇨.
(기러기들은 무엇을 어르느라고 앉았다 내렸다 모였다 흩어지며 갈대를 사이에 두고 울며 쫒는고),

너븐 길 밧기오 긴 하날 아래 두르고 꼬잔 거슨 뫼힌가 屛風(병풍)인가 그림가 아닌가
(넓은 길 밖 긴 하늘 아래에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그러나 구석구석 아름다운 묘사가 넘치는 면앙정가도 다음과 같이 쌩뚱맞게 끝맺고 있으니, 오호 통재라¨. 보고픈 님을 꿈결에서 그것도 먼 발치서 바라만보다가 잠에서 깨었을 때의 허망함처럼 면앙정가의 아름다운 문학적 풍미는 여기서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이 몸이 이렁 굼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내가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이 대목을 음미하며 대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연상한 것은 기자가 아직 무늬만 신자인 덜 익은 신앙인이어서겠지만, 연군지정이 당시엔 종교였단 말인가. 결국 전편에서 언급한 송강 선생의 양(兩)미인곡은 스승의 면앙정가에서 이 끝부분만 철저히 배워가신 셈이다.

꿀꿀한 기분에 답사객이 뜸해진 사이 혼자 누마루에서 <어머나>를 한바탕 뽑고 정자를 내려왔다. 송순 선생을 흠모하는 후손의 귀여운 재롱이었다. 송순 선생도 오백년만 늦게 태어나셨다면 "어이 곽 기자, 우리 노래방으로 가세!" 하셨을 것이다. 틀림없이.

덧붙이는 글 | 출처를 쓰지 않은 삽입문들은 가사 <면앙정가>에서 인용한 것으로, 현대어 역주는 원문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자가 풀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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