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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연기 깃발'은 충남 지역 사람들이 모이기로 약속된 남문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헤매기도 했습니다. 우리 식구라고 별수 있었겠습니까? 깃발 아래 촌놈들이 되어 마냥 헤맸지요.
어딘가 경기장 건물 아래로 지나쳤는데 수영장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길을 헤매고 있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비좁은 수영장에서 신나게 첨벙거리고 있었습니다. 풀장과 헬스장을 처음 본 인상이가 신기한 듯 물었습니다
"엄마 저거 뭐야"
"저건, 물장난 하는 거구, 이건 운동하는 거야, 내가 말해 놓고 생각해 보니까, 내 말투가 꼭 북한 사람들 같구만..."
겨우 남문을 찾았고 거기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네 장의 입장표를 받았는데 좌석 번호가 각각 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공주 연기 깃발에서 벗어나 운동장에 들어섰습니다. 월드컵 전용경기장은 멋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식구는 여전히 헤맸습니다.
이번에는 깃발이 아니라 아빠인 나를 졸졸 따라 헤맸습니다. 좌석표가 각각이었기에 어느 한 쪽에 쪼르르 앉아 있다가 나머지 세군데 좌석 임자들 하고 표를 바꾸려 했는데 그들도 역시 가족 단위거나 한 구성원이었습니다. 깃발도 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우리 네 식구는 좌석 번호가 뿔뿔이 흩어져 찍힌 입장표를 혹여 잃어버릴까 손에 꼭 쥐고 기념사진 찍듯 계단에 쪼르륵 앉았습니다.
남북 축구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북남 대표들의 인사말이 있었고 또 그 전에 축하공연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공연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전혀 볼 수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 대신 당당하게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조국을 이룩하자는 북한 대표를 비롯한 남한, 해외 대표들의 쩔렁쩔렁한 인사말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 조국을 이룩하자는 대표자들의 말은 내 심정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나 뿐 만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함성소리가 그 답을 대신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몇몇 반통일 세력을 제외한 7천만 한민족 모두의 염원일 것이었습니다.
개막식을 마치고 상암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통일 조국'을 외치고 있는데 갑자기 경기장 안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서 요란한 소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였습니다. 애석하게도 '통일 조국'의 외침은 광고 소리에 묻혀 들어갔습니다. 남한의 현실이었습니다. 자본의 거대한 힘이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광고 소음에 순간, 자본은 통일의 큰 힘이 될 수 있지만 또한 '자주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북남 대표선수들의 축구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응원의 함성소리가 높아져 갔습니다. 미국에 빌붙어 사는 길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어떤 '밥충이 보수 신문'과 '밥충이 단체'에서는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말이 더 이상했습니다. 남한 쪽 행사만 한다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북, 북남이 하나로 합친 통일을 향한 행사장에서 남한 쪽 구호만 외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신이 이상하지 않다면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늘 북한을 적대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대시 한다는 것은 화합의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통일의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함성소리가 점점 고조 되면서 파도타기 응원전도 펼쳤습니다. 파도타기가 한창 기세 좋게 급물살을 타고 가다가 여지없이 끊기는 곳이 있었습니다. 기자석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파도타기는 기자석에 닿으면 뚝 끊기고 맙니다.
파도타기를 하다보면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며 일어서기를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한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석에서는 단 한 사람도 파도타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축구경기라는 의미를 지닌 파도타기도 아닌데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일어서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촌놈이라 그럴까요? 파도 타기 만큼이나 그것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북한 대표 선수들이 단 한골도 넣지 못한 아쉬운 경기를 관람하고 공주 연기 사람들은 다시 깃발 아래로 모였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인원이 아주 적었습니다. 나는 뜬금없이 공주 연기 지역을 표시해 놓은 깃발을 보면서 신행정수도 반대 혹은 찬성 집회를 열 때마다 구름떼처럼 몰려다니던 그 많던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충남지역 사람들과 함께 행동했는데 축구경기를 관람한 일부는 떠났습니다. 하지만 공주연기 사람들은 거의 다 남았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결의의 밤'의 행사장이 마련된 경희대로 향했습니다.
본래 밤 행사를 연세대에서 치르기로 했는데 하루 전날 경희대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사람들 얘기로는 연세대 총학생회에서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총학생회에서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결의의 밤' 행사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월 참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하고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학교 측이나 정부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최루 가스와 싸워가면서 행사를 강행했던 게 보통이었으니까요.
연세대 학생들은 당연히 정치적인 집회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로지 공부에 몰두하고자 정치적인 집회를 거부했을까요? 그들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떤 구호를 외칠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연세대에서 조만간 세계적인 석학들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쏟아져 나와 조국통일에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연세대 학생들의 '학구열' 때문에 잠시 기분이 묘했는데 그 우울한 기분을 풀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희대로 출발하기 전, 버스 기사 아저씨가 그럽니다.
"경희대 가는 길 아는 사람 있어요? 우리 기사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경희대 지리를 아는 사람은 다들 천안으로 떠났고, 하필이면 길 모르는 우리 기사들만 남았으니 어쩌겠어요?"
전국에서 몰려든 차량들이 워낙 많다보니 경희대에 도착하자 밤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차안에서 주변 사람들이 먹다 남은 김밥과 경희대 앞에 가게에서 우유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웠습니다.
경희대 광장에서 밤늦도록 통일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행사가 벌어졌는데 우리 집 아이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큰 놈 인효 녀석이 북한 아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남북한 아이들로 분장하여 무대에 나오자 인효 녀석이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물었습니다.
"아빠, 재들 북한 애들여!."
"아니, 남한 쪽 아이들인 거 같은디?"
"북한 애들 만나보고 싶은디, 걔들은 안 왔어?"
"글쎄 잘 모르겠다, 북한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이 날 새벽까지 북한 사람들은 전혀 모습을 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우리 네 식구는 북한 사람들의 손은 잡아 보지 못할망정 북한 사람들이 펼치는 공연 정도는 볼 수 있겠지 기대했는데 끝내 얼굴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하루 전날 연세대에서 경희대로 급히 옮기는 바람에 몇 가지 행사가 취소 됐다고는 하지만 아쉬운 행사였습니다. 인효 녀석이 좋아하는 통일 노랠 부르는 윤민석은 볼 수 있겠지 기대했지만 그조차 볼 수 없었으니까요.
무대 행사를 마치자 각 단체별로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런 저런 단체에 속해 있지 않은 우리 식구는 딱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민주노총에 속한 것도 아니고 민노당도 전교조에도 속해 있지 않아 어정쩡하게 민노총 결의 대회를 참관하다가 새벽 3시 무렵에 잠자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처음에는 네 명이 줄줄이 벤치 하나씩을 차지하고 누워 있다가 그게 좀 미안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본래 충남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경희대 지하 주차장에서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우리 식구는 대열을 이탈해 한의대 건물로 추정되는 어느 곳, 적당히 처마가 넓은 건물 현관을 찾아 자리를 깔고 누웠습니다. 젊은 시절 배낭 하나를 걸쳐 메고 여행 다니면서 숙비를 아끼기 위해 터득했던 노숙의 노하우였습니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잔디밭이 좋다고 눕기 일쑤지만 여름철에는 절대로 잔디밭 신세를 지면 안 됩니다. 새벽이슬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아내는 인적이 뜸한 곳이라 걱정했지만 인적이 뜸한 곳이라 하여 절대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변에 노숙자 동지들로 가득할 것이니까요.
"아빠, 우리 여기서 자는 겨, 노숙자처럼."
"재미있잖어."
"왜, 우리만 여기서 자."
"우리가 자고 있으면 우리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쫙 누워 있을겨."
아침 일찍 일어난 두 녀석이 우리 식구 잠자리 옆으로 줄줄이 잠든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럽니다.
"햐, 아빠 말이 맞네?"
"잘 잤어?"
"우리 내일도 여기서 자는 겨?"
"아니?
"내일도 여기서 자면 재밌겠다."
인상이 녀석은 아주 재미있어 했습니다. 하지만 시골집에서는 좀처럼 모기에 물린 표시를 내지 않는 녀석의 양 볼때기에는 도합 14방의 모기 물린 자국이 있었습니다. 도시 모기가 시골모기보다 더 센 모양입니다.
다시 공주연기 깃발 아래 모여 음식값이 제일 저렴한 경희대학교 부근 지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는데 농민회 어르신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이산가족이 생긴 것입니다.
아침 식사비를 지불하기 위해 어른들에 한하여 각자 얼마씩 돈을 걷기에 우리식구 몫을 지불하자 정선원 선생이 되돌려 주었습니다. 우리 식구가 적게 벌어먹고 사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선원 선생이 대신 지불한 모양입니다.
사범대학을 톱으로 들어갔다가 보안법에 걸려 교도소 수감 생활을 두 차례씩이나 한 덕분에 대학 입학 20년 만에 겨우 교단에 설수 있었던 정선원 선생. 그동안 단 한번도 아이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았다는 정 선생은 충남도 지역 대표로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나는 내내 궁금한 질문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어렵겠죠?"
"아직 접촉이 안 되네요, 북한 사람들과 만나려면 허가증이 있어야 되는데, 보안법때문이죠."
나는 통일 축전의 분위기에 휩싸여 비록 남한 땅에서라도 북한 사람들을 허가 없이 만나게 되면 여전히 그놈의 국가보안법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 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우리 가족들은 북한 사람들과 대화 할 기회가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다는 외국어대학교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산가족'이 된 농민회 어르신들은 거기에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한참 찾았슈."
"아, 뭘 찾어 찾기는."
"어디서 주므셨슈?"
"잠은 뭘 자, 그냥 날쌨지."
"아, 왜 우릴 뗘 놓구 다니는 겨?"
"아이구, 어르신들이 우릴 뗘 놓고 아침 식사까지 먼저 하시구는."
"저승길이 가까워서, 시간이 아까워서 그랬다, 왜."
농민회 어르신들이 구성진 충청도 말씨로 전혀 불만스럽지 않은 불만에 버스 안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말은 느리지만 동작 하나 만큼은 재빠른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처럼 적당히 처마 밑에서 노숙을 했다는데 밭일 나갔다 돌아온 사람들처럼 혈기가 왕성했습니다.
우리 식구는 장춘체육관 행사장에서 북한 사람들의 공연을 볼 수 있을까 한 가닥 희망을 품었는데 버스는 곧장 '반전평화자주통일 범국민대행진'장인 대학로로 향했습니다. 대학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농민회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자, 지금부텀 고향의 봄을 부르는겨, 노래 불러가면서 가야 촌놈소리 안 듣는겨, 자 따라 불러라잉."
"왜 부르는디유?"
"얼마 전 칠월칠석 견우직녀 만났듯이 남북한 사람들이 만나서 부르는 노래이니까 그 감격을 살려서 부루는겨, 잉"
버섯재배를 하고 있다는 농민회 사람의 구수한 입담으로 대학로에 도착했습니다. 대학로 입구에서 한 떼의 전경들을 만났습니다. 완전무장한 전경들이었습니다. 그냥 반바지 차림새로도 땀이 뻘뻘 나오는 더위인데 엄청 고통스럽겠다 싶었습니다. 같은 동포 민족 같은 형제자매들이 모여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치는 자리에서 왜 젊은 청년들이 저 고생을 해야 하는가.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습니다.
"아빠, 저거 방패 맞지?"
검술에 관심이 많은 작은 아이 인상이 녀석이 전경들의 방패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단지 무술을 익히는데 필요한 방패로만 생각할 수 있는 인상이 녀석이 부러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 대축전'은 인상이처럼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들에게 외세의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식구들 또한 그런 세상을 위해 동참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행사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와 아이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통일 의지와는 별개로 볼거리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공연은 고사하고 하염없이 땡볕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못내 힘들었나 봅니다.
"북한 사람들 와서 공연 한다더니."
"내가 잘못 알았나봐, 조금만 기다려 봐봐 공연 할 거니께."
행사가 시작되고 누군가가 차례로 나와 자주 통일에 대한 의지를 밝혔지만 우리 깃발은 행사 무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어떤 사람이 나와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 들리지 않는 무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번 행사에서 나온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통일을 향한 축제를 즐기기 위해 참여한 우리 가족들의 바람처럼 볼거리를 좀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것이고, 또한 각 단체들의 복장이나 깃발 등에 관심을 쏟았으면 어떠했을까 싶었습니다.
통일의 염원을 담아낸 깃발이나 복장들이 많았지만 단체만을 강조한 깃발과 복장들도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속내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이 그들만을 보게 되면 무슨 당 대회나 노조 집회장으로 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다음 민족 대축전 행사에는 각 단체를 대표하는 깃발들보다는 오로지 하나, 통일의 염원을 담은 구호 깃발과 한반도 깃발들로 물결쳤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을 품어 보았습니다.
행사 진행에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잠자리도 제대로 없이 노숙을 해가며 땡볕에 모여 통일 열기를 불어넣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단체를 대변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 없이 우리 민족끼리 자주 평화 통일의 의지로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을.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드디어 대학로에서부터 광화문까지 '반전평화 자주통일 범국민대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깃발은 거의 맨 뒷부분에 쳐져 있었는데 앞서 걷는 행렬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이어졌습니다. 땡볕에 앉아 있다가 걷기 시작하자 아내와 아이들은 행사장에서의 지루함이 가셨는지 표정들이 한층 밝아 졌습니다.
군대에 다녀와 늦깎이로 대학에 다녔던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으며 학생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1987년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학도들이 그러했듯이 당시 내 손에도 화염병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학교 주변에 있는 빈 소주병이 동이 날 정도로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화염병을 만들었습니다.
거리로 나설 때 역시 손에 화염병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손이 잡혀 있었습니다. 나는 화염병 대신 손에 잡힌 내 가족의 체온을 느끼며 평화 통일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행진에 나선 대부분 사람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화염병 투척이 통일을 위한 준비였다면 지금의 행진은 통일의 시작인 것이었습니다.
종묘 부근에서 귀향 버스를 타고 나오는데 까마득히 앞장서서 걷던 학생들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손에는 화염병도 돌멩이도 없었습니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깃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으로 향하는 골목골목이 온통 전경들의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학생들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광화문 어디 만치에 미국대사관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김치가 다 되어 집에 돌아온 우리 식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인효 녀석의 반미 구호 소리를 들어가며 인터넷에서 아주 의미 있는 기사 제목 하나를 접했습니다.
'신세대 66% 미국-북한 전쟁 시 북 편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