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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너무 야박해지지 않느냐"고 했다. "97년 대선자금 문제는 조사하지 않는 게 좋겠다"면서 한 말이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 세풍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고, 나중에 거듭해서 조사를 받았는데 지금 테이프 한 개 나와 가지고 다시 조사를 한다면" 자신이 너무 야박해진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의아함을 떨칠 수 없는 말이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소리 높이 외쳤던 참여정부가, 그래서 검찰의 중립성 확보를 치적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던 참여정부가, 어떻게 수사 가이드라인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한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는가. 그 배경이 궁금하고 그 '배짱'이 의아하다.

더욱 의아한 것은 노 대통령의 화법이다. 그의 화법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입각한 화법이다. 전제군주가 은사를 베푸는 게 아닌 한, 입헌주의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대통령이 야박해진다는 이유로 검찰 조사 여부를 가르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법 논리에도 맞지 않다. 노 대통령은 세풍사건으로 조사를 받았고, 나중에 거듭해서 조사를 받은 이회창 후보가 다시 조사를 받는 상황을 '야박한 상황'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검찰이 세풍사건을 수사하면서 삼성을 봐줬다는 의혹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노 대통령은 '테이프 한 개'에서 나온 내용을 '대선자금'으로 성격 규정하면서 공소시효 소멸을 언급했지만, 시민단체 등에서 뇌물수수 및 업무상 배임·횡령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시민단체 주장대로라면 공소시효는 분명히 살아있다.

준비된 발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메모를 꺼내들어 97년 대선자금 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발적인 발언이 아니라 준비된 발언이라는 얘기다. 가장 궁금한 게 바로 이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이다. 그 누구보다 입헌주의를 잘 알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 원칙을 이해하고, 수사 단서 활용기법을 모를 리 없다. 그런 노 대통령이기에 자신의 발언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또 여론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 왜 노 대통령은 여론과의 대결을 감수하려고 했을까?

언론은 몇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삼성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분석, 연정 불씨를 살리기 위한 유화 제스처라는 분석 등이 그것이다.

국정원이 국민의 정부 때도 불법 감청이 있었다고 발표한 후 호되게 역풍을 맞았던 터이고 보니 그런 분석이 나올만하다.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하는 데 대한 원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이 계속 외풍에 흔들리는 상황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 이회창씨의 지갑을 뒤질 경우 한나라당이 정치보복으로 규정해 극심하게 반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대연정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언론의 이런 분석은 한결 같이 노 대통령의 '작심 발언'이 정략적 판단에 터 잡고 나온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시점에 주목하는 언론도 있다. 천정배 법무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X파일이 아니라 세풍사건 수사내용을 토대로 97년 당시의 '거래 내역'을 수사할 수도 있다고 말한 다음날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점을 주목한 언론은, 노 대통령의 발언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선긋기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언론 분석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고 싶지 않다. 노 대통령이 설령 그런 책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노 대통령 머리 속의 책략일 뿐이다. 공작, 꼼수, 책략이 먹혀들 만큼 한국 정치를 둘러싼 대중 지형이 허술하다고 보는 건 너무 자조적이다.

책략과 철학

더 중하게 짚어야 하는 건 노 대통령의 철학이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가 분명히 있는 사안의 경우 개별 사실의 진상 규명이 1차적 조건이지만, 정경유착이나 국가적 범죄 등 사회구조적 범죄의 경우 구조적 요인을 밝히는 것이 진상규명이다." 97년 대선자금 문제를 사법적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과거사 정리 대상으로 삼자는 뜻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오늘 살아있는 의미가 있는 것들만 해도 할 일이 수없이 많다."

정경유착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므로 진상을 규명해 관행을 없애면 된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은 국민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정경유착이 기업의 부실을 낳고, 그것이 다시 금융 부실로 이어져 IMF 환란을 빚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는 국민은 노 대통령의 그런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IMF 환란이 불러온 그 엄청난 여파를 직접 경험한 수십 수백만의 국민이 어떻게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더구나 X파일에는 IMF 환란을 부른 결정적 계기라는 기아자동차 사태의 발생배경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나와 있다.

과거사 정리는 진혼굿도 씻김굿도 아니다. 진상을 규명해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피해를 배상하는 건 과거사 정리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과거사 정리의 완결상태는 청산이다. 과거에 빚어졌던 일이 되풀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솎아내는 것, 그래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과거사 정리다. 그렇기에 역사는 과거사 '정리'란 두리뭉술한 표현을 쓰지 않고 '청산'이란 용어를 쓴다.

따라서 진상을 규명해 관행을 고치면 정경유착과 같은 사회구조적 범죄는 소멸한다는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단지 원론에만 기대 'X팻말'을 꺼내드는 건 아니다.

97년 대선 당시 벌어진 세풍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를 벌였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공표함으로써 재연될지도 모를 비슷한 범죄를 경계했지만 5년 뒤 그 범죄는 재연됐다. 오히려 라면 박스 대신 차떼기가, 현찰 대신 채권이 동원되는 진화된 형태로….

"수사 다 했다"는 단정은 위험하다

이런 반론을 예상했던 것일까? 노 대통령은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대선자금이) 조(兆) 대에서 수천억대, 수백억대로 점차 내려왔다… 2002년 대선자금 조사로 현역 대통령 정치자금까지 다 했지 않느냐."

이른바 '진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백번 양보해 일면 타당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다 했다"는 노 대통령의 단정은 유보돼야 한다.

검찰은 며칠 전 2002년 대선 당시 삼성이 사들인 채권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 당시 사들인 805억어치 채권 가운데 검찰이 용처를 밝힌 액수는 300억원 가량, 나머지 500억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검찰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그 500억원이 추가로 2002년 대선 후보들에게 흘러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대선과는 전혀 무관한 데 쓰인 것인지 여부는 검찰 수사결과를 지켜봐야 알 수 있다. 다만, 2002년 대선자금 조사가 끝났다고 선언할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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