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성으로 들을 얘기가 아닌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못해먹겠다"라는 말에 이은 초고강도 발언이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노 대통령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신호가 여러 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문화일보> 등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5·6월경에 골프장에서 조우한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에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여당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자 유 의원이 "대통령이 말씀을 너무 많이 한다", "청와대가 너무 앞서 나가는 것 같다"는 등의 말로 받으면서 언쟁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는 것이다. 유 의원은 "노 대통령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언론에 보도된 이 내용은 전언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확인이 필요하고, 확대 해석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골프장 사건' 외에도 노 대통령의 심기를 읽을 수 있는 통로는 또 있다.
어제 열린 KBS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은 "민심을 그대로 모두 수용하고 추종만 하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백성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데 수백 년이 걸린다면서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민심을 읽는 것과 그 시기 국민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도 비슷한 말을 했다. 조기숙 수석은 어제 CBS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시고 국민들은 아직도 독재시대의 지도자와 독재시대의 문화에 빠져 있다"며 "대통령이 자꾸 장기적인 혁신을 하려고 하는데 이게 국민들하고 의사소통이 잘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짙은 서운함과 더 짙게 배어있는 소망
노 대통령과 조 수석의 말에는 서운함이 짙게 배어있다. 대통령의 진심과 비전을 국민이 너무 몰라준다는 서운함이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걱정해야 되는가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는 노 대통령의 말에는 이런 서운함이 짙게 깔려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야'와 같은 극단적 상황의 도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지지율 29%의 민심'을 거론한 후 "민심을 추종만 하는 게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니다"고 했고, "쫓겨날 때는 쫓겨나더라도… 소신에 따라서 일하는 신하"의 모습을 고수하겠다고 말했다.
정리가 필요한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노 대통령은 "쫓겨날 때는 쫓겨나더라도" 소신껏 일하겠다면서도 왜 "권력을 통째로 넘겨주는 걸 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을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소신' 가운데 하나로 다시 연정론을 제기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나라 정치제도가 내각제가 아니어서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통해서 재신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국민적 지지·여론조사 결과를 가지고 대통령직을 불쑥 내놓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고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화법은 '불만 표출'이지만 그 바탕엔 '소망'이 깔려있다. 며칠 전에 했던 말, 내각제 하의 슈뢰더, 고이즈미가 부럽다고 했던 그 말과 같은 맥락에 있는 말이다.
노 대통령은 정치구조를 바꾸고 싶어 한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경직된 정치구조를 바꾸고 싶다는 의사는 노 대통령 본인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노 대통령은 그 때마다 연정을 제안했고 선거제도 개편을 요구했다. 여기까지는 익히 아는 일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세하지만, 눈에 안 띌 수 없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 본인 스스로 '내각제'를 직접 언급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열린 지방언론사 편집국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양원제' 필요성까지 거론했다.
이것들은 권력구조의 문제로 개헌을 통해서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연정론이 처음 제기됐을 때 청와대는 "개헌과는 별개"라고 선을 그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개헌과 긴밀히 관련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내각제?
"권력을 통째로 넘기는 것을 검토할 수도 있다"는 노 대통령의 말을 이 맥락에 포함시켜 해석하면 하나의 상황이 설정된다. 선거제도 뿐만 아니라 권력구조 문제까지 아울러 일괄처리하고 그에 맞게 선거를 다시 실시하는 상황이다. 새 선거제도에 맞춰 국회의원을 다시 뽑고, 새 권력구조에 맞춰 대통령이든 수상이든 다시 뽑는 상황이다.
물론 두 선거는 동시에 치러져야 한다. 청와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권력구조가 내각제나 내각제에 준하는 이원집정부제라면, 선거는 동시에 실시돼야 한다.
이럴 경우 선거는 조기에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예정된 2008년 총선 일정에 맞춰 실시하면 대통령의 임기가 연장되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따라서 선거의 데드라인은 2007년 대선 일정이다.
하지만 이 일정표는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새 헌법과 새 선거법이 도입되는 순간, 구 헌법 하의 대통령, 구 선거제도 하의 국회는 사실상 권능을 상실한다. 선거를 미룰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고, 미뤄서도 안되는 상황이 조성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노 대통령은 싫어도 권력을 통째로 내놔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너무 앞서 나간 전망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말을 작위적으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인 유시민 의원이 오늘 아침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나와 한 말을 되새겨 보면 이런 전망이 꼭 허무맹랑한 그림그리기인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유 의원은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선거주기 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한국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다시한번 거론하면서 선거제도 뿐 아니라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며 선거주기 조정 문제를 제기했다. 대선과 총선 주기를 같게 하자는 것이다.
유 의원은 노 대통령이 "권력을 통째로 넘기는 것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한 다음 날, 방송에 나와 왜 이런 말을 던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