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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의 주제는 '감상'이다.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토를 달지는 말자. 오늘 글의 소재도 '감상'이다. 언론의 '감상문' 몇 개가 오늘 글의 소재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웰컴 투 동막골'을 사설로 올렸다. 두 신문은 "국군도, 인민군도, 미군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한편이 되는 그 무(無)적(敵)의 마을"(<경향신문>)에서 전개되는 판타지에 열광하는 이유를 "압도하는 갈등구조에 의해 유폐됐던"(<한겨레>) 한국민의 평화에 대한 시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애욕하고 폭폭한 우리의 살림살이가 "총은 작대기가 되고, 수류탄은 터져 팝콘비로 내리는…일방적 편가름이나 승패는 존재하지 않는" 동막골에 대한 갈구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신문이 '웰컴'을 외칠 때 <조선일보>는 '그리움'을 묘사했다. '조선데스크'는 '불멸의 이순신' 종영에 즈음해 이런 감상문을 남겼다. "부하에게 자상했고, 권력 다툼에 빠지지 않았던 이순신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간절히 그리워하는 지도자의 전형이었다…드라마의 마지막회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이순신의 최후 못지않게 그와 같은 지도자가 부재하는 현실에 더 가슴아파했다."

'지도자가 부재하는 현실'에 대한 개탄을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결하고, 그 그리움을 다시 현실에 대한 비판거리로 삼는 <조선일보>의 '감상문'은 '김대중 칼럼'의 다음 한 구절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노 대통령은 '제발 그만두겠다는 소리 그만 하든지 아니면 정말 그만 두든지 해야지, 지겨워서 못 살겠다'는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과 선조를 보며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배운다."

두 문화상품이 '전쟁'이란 똑같은 상황설정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반된 메시지를 담았듯이, 두 부류의 언론도 전혀 다른 코드로 문화상품을 선택했고, 그 메시지를 추려냈다.

'조선데스크'의 분석처럼 특정 문화상품에 대한 기호가 "한 시대에 대해 꿈꾸고 있는 욕망을 투사"한 것이라면, 두 부류 언론의 '다른 기호'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립항으로 놓지는 말자. 평화를 갈급한 <경향신문>과 <한겨레>도 "나라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추레한 일상을 막론하고 어느 하나 희망이 아득"하고, "이념과 지역, 나이, 계층 갈등으로 골병이 들어가는" 우리의 현실을 한탄했으니까. 또 '진정한 리더십'을 갈망한 <조선일보>도 "상상속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니까.

한 부류의 언론은 '인간의 화해'를, 다른 한 부류의 언론은 '영웅의 리더십'을 강조한 점에 근거해 그들의 '감상문'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다소 기계적이란 느낌이 든다.

그저 한 가지 사실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회색 현실에 천연색 꿈을 칠하는 것이 욕망이라고 하지만, 욕망은 그저 욕망일 뿐이다. 욕망을 현실로 만들려 할 때 그것은 이념과 계층의 외피를 쓰게 되고, '위안을 주는 상상'은 '소통 단절의 세계'가 돼버린다. 이게 '욕망의 현실'이다.

'욕망의 현실'을 인정한다면, 두 욕망이 발 딛고 선 현실을 재차 돌아봐야 한다. '무(無)적(敵)의 마을'을 꿈꾸든, '무적(無敵)의 지도자'를 원하든 두 욕망은 '적(敵)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적과의 평화'든 '적의 평정'이든 그건 둘째 문제다. '잠깐의 위안' 뒤에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로 돌아온 이들은 두 언론의 두 욕망을 '현실적으로' 읽을 것이다. 그들의 '욕망'에 입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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