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를 기억하는지,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로 시작해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로 끝나는.
그때만 해도 낯설었던(지금은 아무래도 촌스럽다) '프리지아'라든가 '칵테일'이라든가 하는 이국적 단어들을 사용한 간지러운 가사와 달콤한 멜로디에 그만큼 밝고 가벼운 음성이 더해졌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90년대 초반 최고의 유행가 '칵테일 사랑'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신나게 불렀던 가수들이 실제로는 남의 목소리에 맞춰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에도 '칵테일 사랑'은 오래도록 사랑받아 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진짜 주인공 신윤미씨가 돌아왔다. 93년 유학을 떠난 후 12년만에 고국 콘서트를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30일 홍대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콘서트는 9월 2일 오후 8시 영산 양재홀(베데스다 대학교 건물 지하 1층)에서 열린다. 신계행과 소리새, 나무 자전거 등이 게스트로 참여한다.
- 메일에 썼던 대로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저 '기막히게 노래 잘 하는 가수'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기대가 없는 만큼 편견도 없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그는 잠시의 주저도 없이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풀어나갔다. 인터뷰를 하는 두 시간 내내 그는 쉴새없이 말했다. 워낙에 달변이기도 했지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노래했다. 선화예고 작곡과, 이화여대 음대 작곡과를 거치는 동안 음악은 그냥 내 일상이었다.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의 상심이 컸다. 어머니를 위로해줄 심산으로 대학가요제에 나갔고 '겨울비'라는 곡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여기저기서 음반을 내자는 섭외가 들어왔고 가수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이대에서는 연예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방송국 측에서 공문을 보내주고 내가 총장에게 '난 평생 이 일 하며 살 거고 학교에 누가 되지 않는 활동을 하는 가수가 되겠다'고 편지를 써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내가 이대 다니며 노래 부른 가수 1호일 거다(웃음)."
뮤지션과 엔터테이너의 갈림길에 서다
- 많지 않은 나이에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려운 점도 많았겠다.
"그 시절에는 가수라고 하면 좀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뭐 '딴따라'라는 식으로. 그래서 음악감독 일을 병행했는데(그는 MBC TV 제작부 음악감독으로 <주부가요열창> <우정의 무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프로그램을 맡았다) 이젠 나를 가수가 아니라 동료로 보는 거다. 프로듀서들이 내 노래를 많이 틀어주어야 뜰텐데 내 노래는 틀 생각을 안 해서 속상하기도 했다."
- 그러던 중에 솔로 앨범 <새장을 열고>(1988)와 <이젠 됐어>(1991)를 냈다. 앨범을 내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기획사에서 주는 노래와 내가 하고 싶은 노래가 너무 다른 거다. 아무도 내가 원하는 음악을 원하지 않았다. 그때 심각하게 고민했다. 뮤지션이 될 것인가 엔터테이너가 될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뮤지션은 자기 노래와 색깔, 세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그런 느낌. 연예계는 화려한 만큼 공허했고 돈을 번만큼 술을 먹었다. 우연히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 길에 <한계령>이라는 노래를 듣고선 엄청 울었다. 그 길로 미국으로 떠났다. 뭔가를 찾을 때까지는 노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그래서 미국에서 그 '뭔가'를 찾았나?
"미국 내 소수민족과 관련된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생전 하지 않던 깡통줍기나 바느질 등등 별 거 별 거 다 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도 미국에서는 세탁소나 봉제공장에서 일한다. 일하느라 손에 지문이 닳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히 이민 1세대들의 경우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떠나온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스스로 떠났으면서도 떠밀려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 다 설움이 된다. 미국에 있는 동안 북한 동포 돕기나 94년 LA 폭동 이후 반이민법 상정 당시 이에 반대하는 콘서트 등에 참여했던 것도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엔가는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잠든 추레한 아주머니를 보고는 저 이를 데려가서 된장찌개를 끓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다. 부끄럽지만 예전의 나는 자기를 꾸미지 않는 사람은 여자로서 자기를 방관하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비슷한 느낌을 한국에 있을 때도 가져본 적이 있다.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만났던 은주라는 친구가 있는데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집안일을 하느라 늘 학교에서는 자고 중학교 1학년인데도 한글을 모르더라. 은주를 붙들고 한달 동안 한글을 가르쳤더니 가는 날 선물이라고 뭔가 묵직한 걸 가져왔다. 자기 어머니 걸 가져왔는지 핸드백을 빨아서 덜 마른 가방을 넣어온 것이었다.
음악감독하면서 금호산 꼭대기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구경 온 사람들이 그 뙤약볕에 4-5시간을 기다리더라. 공연을 시작하니까 몰입해서 좋아하면서 박수를 치는데 그걸 보고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 궁금했다."
- 소수민족과 이민자의 삶을 그린 <하루를 마치고>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꼭 모시러 올께요> 등의 노래에 그런 변화들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 왜 내 노래가 더 인기있지 않은지 속상했다. 코드나 가사가 단순한 곡들은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작곡을 해도 복잡한 코드와 구성을 썼다(그는 이 무렵의 노래들을 두고 "지금 내놔도 전혀 손색없는 수준"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남의 땅에서 이렇게 고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노래, 우리의 전통 유희인 사물놀이처럼 모두 함께 흥을 내며 즐기는 노래를 하고 싶었다. 쉬우면서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18세 순이>같은 노래들. 나중에서야 그런 작곡이 제일 어렵다는 걸 알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가수이고 싶다
- 현재 뉴욕 라디오 코리아 <신윤미의 노래세상>을 진행하고 있다. 노래와 또 다른 분야일텐데.
"라디오 코리아의 상황이 열악하다보니 작가나 피디가 따로 없다. 내가 글 쓰고 진행하고 음악 틀고 다 해야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과 좀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잊지 못할 사연들도 많다. 영주권을 받지 못해 10년간 불법 체류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불법 체류자라 한국에도 가지 못하고 마음 아파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전화 한 통 하지 못한다는 사연을 보내오셨다. 그래서 우리 프로에서 아주머니와 그 분 아버지가 통화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었다. 두 분 다 말을 잇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셨다. 나도 울고 애청자들도 울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었는데 마침내 그 분이 영주권을 받아서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우리 방송 때 들었던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즐거운 일도 많다. 노래자랑 코너나 노래를 배워보는 코너를 진행할 때면 다들 얼마나 열심이신지 모른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새벽 네 시고 다섯 시고 모여서 같이 응원도 하고 그랬다."
- 오랜만의 고국 무대를 앞두고 느낌은 어떤가?
"부담스럽다. ("늘상 노래를 하고 또 그렇게 잘하고 뉴욕에서도 수차례 공연을 했는데도 부담스러우냐"고 물었더니) 잘 하고 싶다는 부담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예전처럼 조바심도 들고 걱정도 되더라. 표가 안 팔리면 어쩌지? 날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나? 지금은 마인드컨트롤 중이다. 허름한 카페에서 단 한 명이라도 내 노래를 원하는 관객이 있으면 부르겠다는 초심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를 기억해주고 기다려준 팬들에게 있는 나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다듬어진 꽃밭이 아니라 듬성듬성한 잡초라고 해도."
- 어떤 노래들을 부르나?
"한국 분들도 아실 만한 옛날에 불렀던 노래들과 미국에서 발표했던 노래들, 그 외에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팝송이나 가요도 부를 생각이다."
- 신윤미에게 음악이란?
"언젠가 '난 노래를 잘하는데 왜 안 뜰까'하는 이야기를 동료 가수와 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가 그러더라. "넌 너무 잘 하는 게 많아서 그렇다"고. 자기는 노래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다 이거다. 그 말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음악 외에도 다른 일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래에만 충실하지 못했는데 다른 가수들은 노래에 목숨을 걸고 있었으니까. 지나고 보면 다양한 경험들이 지금 내게 연륜으로 남았다. 음악은 내 삶 그 자체다. 살아있기 위해 음악을 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음악을 한다."
덧붙이는 글 | 이프토피아(www.iftopia.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