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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충량, 예량 형제와 최효일이 의주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장판수는 함경도의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풍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동안 장판수는 칡뿌리만 씹으며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운 좋게 길에서 뱀이나 토끼를 잡아 포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일부러 이를 잡아먹겠다고 쫓아다니다가는 낯선 산길에서 길을 잃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된 사정은 도무지 인가를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보이는 집도 모두 빈집뿐이었고 쌀독은 텅 비어 있었다.
'이거 전란 때문에 사람 씨가 마른 것인가?'
장판수로서는 가끔씩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회의감이 들곤 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주 정확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지 과연 가야하는 길인지 끊임없이 고뇌가 교차했다. 그럼에도 장판수가 풍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내가 이제 와서 이 길을 벗어난다면 갈 곳은 어디인가!'
장판수는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그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었지만 그 자신만을 바라본다면 애써 지킬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판수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질시와 냉대뿐이었다. 인가와 접한 지 나흘 만에 나무가 얼기설기 쌓여져 있다시피 한 쓰러져 가는 귀틀집에 도달할 때까지 장판수는 이러한 번뇌를 안고 걸어갔다.
"게 뉘시우?"
의례히 빈집이라고 생각한 귀틀집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자 장판수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렇지만 장판수는 그러한 감정을 앞세우도록 살아온 인물이 아니었기에 들뜬 감정은 금방 뒤로 물릴 수 있었다.
"산길을 넘어가던 과객인데. 밥 한 술 얻어먹을 수 있을 까 해서 염치 불구하고 왔습네다."
"허허허… 요사이 밖이 꽤 소란스럽다 들었는데 지나가는 과객이라."
귀틀집에서 나온 이는 남루한 옷차림에 수염이 허연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장판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침 저녁을 짓고 있던 참이외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소?"
장판수는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린 뒤 마루에 걸터앉아 닳아빠진 짚신에 동여 맨 천 조각을 살펴보았다. 늙은이는 이를 차분히 눈여겨보며 부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렇게 궁벽한 곳에 사는 이들도 있구나.'
잠시 후 늙은이는 커다란 밥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곡밥에 짠 무를 찔러 담아 된장만 그득 담긴 찬을 개다리 상에 얻어 차려 주었다. 며칠 동안 칡뿌리만 씹고 다녔던 장판수라 이는 엄청난 진수성찬과 다름없었다. 달디 달게 밥그릇을 단숨에 비운 장판수는 밥 한 그릇을 더 권하는 늙은이의 성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숭늉까지 주욱 들이켠 장판수는 구석 골방에 잠자리를 마련해놓은 늙은이의 호의에 진정으로 감사함을 표하며 일찌감치 따뜻한 온돌방에 몸을 데우며 깊이 잠에 빠졌다. 한동안 몸조차 뒤척이지 않고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졌던 장판수는 어느 순간부터 괴로워하며 몸을 뒤척였다. 뒤숭숭한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판수야!"
평소에는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던 장판수의 아버지가 꿈에서는 얼굴에 피를 흘리며 생생한 모습으로 장판수의 앞에 서 있었다.
"판수 이놈아! 너 때문에 내래 저승에서도 평온하지 못하구나! 집안의 업보를 이만 끊어야 하느니라!"
장판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니가 뭐라고 하는 지 안다! 우리 부자는 함부로 살생을 한 게 아니다! 하지만 타의로 죽은 자의 혼백은 후생의 원수로서 집안을 괴롭힐 것이니 집안에 손이 귀할 것이라 하더라!"
겨우 말문이 트인 장판수가 소리쳤다.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합네까!"
"풍산에 가지마라!"
장판수가 다시 한 번 소리치려 했으나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사방에서 괴기스러운 기운이 감돌더니 소름끼치는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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