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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100주년, 해방과 분단 60주년, 한일협정 40주년, 6.15 공동선언 5주년…. 이처럼 올해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들이 유난히 많은 해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 빠진 것이 있다. 2005년은 과거-현재-미래에 있어서 그 의미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주한미군 주둔 6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60년전 9월 8일 인천항에 첫발을 디딘 주한미군을 해방군으로 봐야 할 지, 점령군으로 봐야 할 지는 한미관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프리즘이기도 했다. 정서적 거부감을 뒤로하고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보면, 당시 주한미군은 분명 점령군이었다. 당시 태평양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포고령 제1호'를 통해 미군의 성격을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하고 모든 행정권을 장악해 군정을 실시하는 주체로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60년간 주한미군은 지독하리 만큼 역설적인 존재로 한국에 다가왔다. 미국이 1949년 6월 29일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지 1년만에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한반도는 전화(戰火)에 휩싸였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개입을 선언했고, 주한미군은 다시 한국에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군 공백이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사례는 '주한미군 철수=북한의 남침'이라는 등식을 가져왔고, 이는 맹목적 친미주의를 낳은 원천이기도 했다.

분단의 원흉-구원의 나라... 주한미군은 미국의 이중성 상징하는 존재

1945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까지의 8년간, 미국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한반도 역사의 설계자나 다름없었다.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분단과 점령, 철수와 재개입, 현상타파(북진통일)와 현상유지(정전협정)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사이에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일제를 패망시킨 해방자이자 한반도를 두 동강 낸 분단의 원흉,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준 구원의 나라이자 무차별적인 인명 살상을 저지른 학살자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심어주게 되었고, 주한미군은 이러한 미국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수십년동안 주한미군은 해방자와 구원자라는 이미지만을 가지고 '냉전의 성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민중의 힘'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주한미군도 더 이상 '냉전의 성역'에서 머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적어도 담론 수준에서는 주한미군에 대해 어떠한 얘기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이는 한미관계는 물론이고 한국사회 내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점증하는 반미감정에 당황한 미국은 이른바 한국 여론을 상대로 한 '공공 외교'(public diplomacy)의 강화에 나서는 한편, 때때로 '주한미군 철수론'을 흘리면서 남남갈등을 통한 한국 길들이기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주한미군 지지 시위'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 역시 예전과는 달라진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주한미군을 둘러싼 담론의 가장 큰 한계는 주한미군 그 자체를 '목적'시 하는 경향이다. 이는 친미는 물론 반미진영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즉, 주한미군 주둔론자는 미군 주둔에 따른 '득'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미군철수시 야기될 수 있는 문제를 부풀림으로써 영구 주둔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반면에 미군철수론자는 주한미군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하면서, 미군철수시 야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미군 철수시 발생하는 군사력 공백은 어떻게 할 것인가

따라서 주한미군을 둘러싼 담론을 한 단계 성숙시키고 바람직한 문제해결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을 '목적'이 아닌 '수단'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둔이다, 철수다'라는 식의 선험적인 결론에 앞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을 비롯한 한미동맹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실 현재는 물론 미래의 주한미군을 생각하면, 선뜻 정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 이상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딜레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가령 미군철수시 발생하는 군사력의 공백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막대한 국방비 증액을 감수하고서라도 군사력 공백을 메워야 할지, 아니면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 정부의 외교적 역량 강화와 시민사회의 신외교를 통해 군사력의 공백을 메워야 할지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병력 감축과 전력 증강을 동시에 꾀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변화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 대폭적인 국방비 증액을 추진해오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군 철수'가 대대적인 군비증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진 만큼, 미군철수의 따른 군사적 공백을 메울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미군에 의존해온 한국군의 구조 자체가 대단히 기형적인 데다가, 한국의 안보문제는 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한미군 철수시 한미관계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미국이 주한미군 주둔을 원하는 상태에서 한국 여론에 따라 강제적으로 철수될 경우 한미관계가 결코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점 역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한미관계가 지고지순의 가치는 아니더라도, 미국과의 관계 훼손시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 역시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통일 이후 주둔문제는 더 큰 딜레마

주한미군 딜레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가 더 문제다. 한민족이 21세기 최고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통일을 생각하면, 주한미군이라는 존재가 안겨줄 딜레마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통일 코리아와 주한미군의 상관관계를 생각할 때, 핵심적인 딜레마는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다.

즉, 미국이 대중국 봉쇄전략을 21세기 핵심적인 외교안보전략으로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이후의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면,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통일'을 의미하는 현상 변경보다는 '분단'을 의미하는 현상 유지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미국이 통일이후에도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기를 원하는 상태에서 한반도 통일이후에 주한미군이 철수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면, 이번에는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 유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는 주한미군과 관련해 가장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주한미군 문제는 쉽게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성격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도 더 이상 늦출 수도 없다. 특히 미국은 중장기적인 전략하에 주한미군을 어떻게 유지·강화할 지에 대한 세밀한 검토에 들어간 상황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해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한반도 역시 미국의 밑그림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겨레신문 9월 2일자에 기고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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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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