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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과 달라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추소리 모습
옛날과 달라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추소리 모습 ⓒ 이찬훈

옥천의 명물 '올갱이국'으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역시 누나의 안내로 대전 야경을 보기 위해 식장산엘 갔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그 후 곧 고향을 멀리 떠나 살아왔기 때문에 대전의 야경을 감상할 기회가 없었던 동생을 위한 누나의 배려였다.

자형과 함께 야생화와 곤충 등의 접사 사진만을 주로 찍어 아마추어 사진작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누나는 산소의 풀을 뜯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오랜만에 고향에 온 동생을 위해 식장산 안내를 자임했다.

식장산에서 처음 내려다 본 대전의 야경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대전의 밤 풍경은 어느 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고, 주변에는 야경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식장산에서 내려다 본 대전 야경
식장산에서 내려다 본 대전 야경 ⓒ 이찬훈

누나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난 다음날 새벽, 이번에는 자형이 나설 차례였다. 전날 밤 늦게 돌아와서는 처남과 술친구 해 주느라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건만, 자형은 또 새벽같이 일어나 처남을 위해 용암사 안내에 나서야 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벌초를 위해 고향에 올 때부터 내가 꼭 가봐야겠다고 작정한 또 한 곳은 바로 용암사였다. 용암사는 옥천 장령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다. 그리고 그 용암사는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한두 번 봄 소풍을 가기도 하고, 가끔 놀러 가보기도 한 곳이다.

어릴 적 소풍을 갔을 적에는 멀어서 다리가 아프기만 하고 그리 좋은 것도 모른 채 다만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곳 용암사는 전국 사진가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곳으로, 누구나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장소이다.

용암사는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새벽 운해와 그 운해 속에서 떠오르는 일출 풍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이 되었다. 보통 사진가들의 말로는 11월경의 용암사 운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지만 절에 계시는 스님 얘기로는 사실 9월 중순 경의 운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자형의 사진을 포함해서 용암사 운해와 일출의 아름다운 풍경을 찍은 많은 그림을 접해 온 나는 이번에 용암사 운해를 직접 가서 보고 사진에 담아보고 싶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 자형과 내 아내와 나 세 사람은 용암사로 향했다.

옥천에서 이원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있는 소정리 쪽으로 들어가 용암 낚시터를 지나 계속 올라가니 얼마 되지 않아 절 바로 아래 공터에 이르렀다. 이미 사진가 몇 명이 와 있는 듯 승용차 몇 대가 주차해 있었다.

서둘러 내려서 대웅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마애불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용암사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차분하고 고요해, 맑은 풍경소리의 맛과 같았다.

용암사 대웅전 뒤에서 내려다 본 운해
용암사 대웅전 뒤에서 내려다 본 운해 ⓒ 이찬훈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짧은 돌 길 옆으로는 푸른 대나무가 늘어서 있다. 속세에 묻은 때를 모두 벗겨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만나 보라는 듯, 그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은 맑은 향으로 마음을 정화해 준다.

용암사 대웅전 뒤 청량한 대숲 길
용암사 대웅전 뒤 청량한 대숲 길 ⓒ 이찬훈

그리고 그 대숲 길 초입에 깔린 작은 돌에는 멋진 달마도가 한 점 그려져 있다. 작을 뿐 아니라 처음 길을 오를 때에는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는데 날이 밝아지고 나서 그 길을 다시 오를 때 눈 밝은 아내가 발견해 가르쳐 주었다.

스님인지 아니면 일반 불자인지 모를 분이 아마도 매직 같은 걸 이용해 쓱쓱 그려놓은 듯한 그 달마도는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고, 성품을 보아 성불하라는' 선법을 전한 달마대사의 형형한 혜안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한 명품이다.

얼어붙었던 땅으로부터 새 생명을 불러내어 다시 살려내는 봄빛처럼 자비로운 부처님의 뜻을 체득하고 있는 눈 밝은 분의 솜씨임을 '춘광(春光)'이라는 글자가 말해준다.

마애불 오르는 대숲 길 초입 바닥 돌에 그려진 달마상
마애불 오르는 대숲 길 초입 바닥 돌에 그려진 달마상 ⓒ 이찬훈

그 맑은 대숲 길을 지나면 맑은 마음으로 그렇게 자애롭게 서 계시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불상이 아직 형식화된 양식에 따르기 이전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다. 은은한 붉은 색이 감도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아직도 붉은 입술이 선명한 아름답고 자비로운 여성 모습의 부처님이시다.

자비로운 모습의 용암사 마애불
자비로운 모습의 용암사 마애불 ⓒ 이찬훈

나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정형화되고 고정된 격식에 맞춘 불상보다는 이 부처님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형상화한 불상에 훨씬 정감이 간다. 예컨대 경주 불곡 감실 부처님이나 충북 괴산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양의 마애불, 그리고 꼭 이웃집 아줌마 같은 모습의 성주사지 불상 등이 그러하다.

왠지 딱딱하고 고답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느껴지기 쉬운 정형화된 불상에 비해 용암사 부처님은 부드러운 여성적 모습을 통해서 진속불이의 진리와 자비로운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 주는 듯하다.

이 마애 부처님 앞이야말로 환상적인 용암사 운해와 일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비록 이 날은 해가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지만 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면 그 밝은 태양 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환히 밝혀 줄 것임이 틀림없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해야 하는 사정으로 자형은 사진 몇 컷을 찍고는 먼저 산을 내려갔다. 뒤에 남은 아내와 나는 마애불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전경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내려와 뒷산으로 올랐다. 마애불 위쪽에 있는 전망 좋다는 또 다른 포인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대웅전 옆길을 내려와 올려다보니 커다란 암벽을 깎아 새긴 마애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용암사 마애불 전경
용암사 마애불 전경 ⓒ 이찬훈

대웅전을 마주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산정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보물인 쌍삼층석탑이 나란히 서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용암사 쌍삼층석탑
용암사 쌍삼층석탑 ⓒ 이찬훈

그리고 이 쌍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면 대웅전을 포함한 그리 크지 않은 용암사의 아담한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용암사 대웅전과 전경
용암사 대웅전과 전경 ⓒ 이찬훈

아내와 나는 다소 가파른 산길을 올라 전망이 확 트여 보기 좋고 사진 찍기에도 좋은 포인트가 되는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이미 몇 명의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용암사의 운해를 열심히 사진 속에 담고 있었다.

아내는 이내 바위에 편히 앉아 환상적인 용암사의 운해를 그윽히 바라보며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관조삼매에 빠졌고,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계속 변화하는 운무의 모습 때문에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고 한 아내의 말처럼,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산 사이를 용트림 하듯 흐르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며 장관을 연출해 준 용암사 운해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용암사 뒷산 위에서 내려다 본 운해
용암사 뒷산 위에서 내려다 본 운해 ⓒ 이찬훈

새벽에 도착해 아침 9시가 넘도록 용암사의 운해에 푹 빠져 있던 우리는 산을 내려와 다시 마애부처님께로 가 다시 한 번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 앞에 잠시 앉아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 용암사를 열어주신 부처님의 공덕에 감사를 드렸다.

벌초를 깨끗이 하고 조상님 모시는 일에는 뜻이 없고, 오직 사진 찍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는 아내의 핀잔을 받았지만, 나는 속으로 고향 근처에 자리 잡고 계셔서 가끔씩이나마 고향을 찾아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의 음덕에 감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산소 돌본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더 자주 고향을 찾아와 꿈엔들 잊힐 리 없는 아름다운 내 고향 옥천과 용암사의 모습을 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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