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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하였던 임영웅선생님의 당시 모습
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하였던 임영웅선생님의 당시 모습 ⓒ 강인춘
임영웅 선생님!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선생님의 이름입니다. 한 30여 년이 넘었군요.
그 동안 신문, 방송을 통해서 가끔 선생님의 동정을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아직도 나이를 생각치 않으시고 연극에만 열중하시는지요? 지금의 저는 연극과는 멀리 떨어진 그림활동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더더욱 선생님을 자주 뵙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오늘 새삼스럽게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 것은 우연히 저의 집 서재에 있던 스크랩 파일을 정리하다가 극단 '산울림'의 흔적들이 몇 점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스크랩을 보고 있는 동안 저는 30여년전의 땅땅하신 선생님과 패기 만만했던 저와의 첫 만남의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968년 남산의 KBS-TV시절. 어느 날 복도를 지나다 스튜디오가 내려다 보이는 주조정실에서 선생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날 선생님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한 손에 대본을, 또 한 손은 허공을 박력있게 가르면서 카메라의 넘버 컷팅를 정신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런 정열에 온 정신이 빠져 한참을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저거야! 예술가들의 정신 몰두는 미치는 거야!"
그 날 이후 저는 선생님의 드라마를 좇아다니면서 열심히 '타이틀 백'을 써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강인춘씨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하시면서 극단'산울림'의 창단 C.I 작업을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로고, 포스터, 팸플릿, 전단, 티켓 등의 디자인 일체였습니다. 저한테는 더 없는 영광이었고 또한 기회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저는 연극에 관해서도 많은 상식을 얻었고, 스태프들, 출연진들과 끈적끈적한 교우관계도 생겼습니다. 지금 최고의 연출가로 불리우는 김도훈씨, 채윤일씨 등은 그 때 시절에 만났던 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연극의 문외한인 제가 선생님으로 인해서 연극계의 일원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 뒤 결국은 연극의 매력에 이끌려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에 맞추어 KBS에서 국립극장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아 직장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임선생님의 테드 마크인 '고도를 기다리며'
임선생님의 테드 마크인 '고도를 기다리며' ⓒ 강인춘
임영웅 선생님!
선생님은 69년 10월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한국문화대상에서 연극부문대상>을 수상하자 그 부상을 기금으로 같은 해 12월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출연했던 배우 김성옥, 김인태, 함현진, 김무생, 사미자, 최선자, 윤소정, 손숙, 윤여정 등등 여러분의 뜻을 모아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것이 70년 여름이었지요. 벌써 36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스태프 각자가 해야 할 일까지 하나하나 직접 챙기셔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보고 우리 스태프들이나 캐스트들은 선생님에게 "임돼지"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아셨어요?

그리고 역시 저에게도 연극 공연 포스터나 팸플릿을 의뢰하실 때에도 못미더워 깨알 같은 글씨의 메모지를 보시면서 일일이 설명해 주셨지요. 좋은 지휘자 밑에 좋은 공연이 나온다는 것을 실제로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제가 디자인 한 극단 '산울림'의 창단공연 자료 몇 가지를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선생님도 가지고 계시는지요?

ⓒ 강인춘
극단 '산울림'을 창단하시고 첫 공연인 '아더 밀러' 원작인 '비쉬에서 일어난 일'의 공연 팸플릿입니다. 말하자면 '산울림'의 최초 공연 팸플릿입니다. 지금 보면 디자인이 촌스러워 얼굴이 벌겋게 붉어집니다만 그 시절엔 활자체도 다양하지 못했고, 또한 '사진식자기'라는 기계로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찍어서 인화지로 뽑아 가위로 오려서 대장에 풀로 붙여 만든 제작 과정이라 촌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연진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김성옥, 함현진, 최지민, 김무생, 이묵원, 김인태, 남일우씨 등이었습니다. 스태프들도 선생님의 욕심처럼 일류급이었습니다. 미술에 장종선, 조명에 이우영, 음악에 김기갑, 분장에 전예출, 조연출에 이인호, 무대감독에 김도훈, 디자인 강인춘. 71년 2월. 국립극장

ⓒ 강인춘
'산울림' 3회 공연 작품인 '로버트 볼트' 원작 '꽃피는 체리' 71년 6월. 국립극장. 출연진: 김성옥, 김인태, 함현진, 이성웅, 사미자, 윤여정, 조영일. 너무 딱딱한 기하학적 문양으로만 된 것이 흠으로 생각됩니다.

ⓒ 강인춘
'산울림' 4회 공연 작품인 '헬만 그레씨이커' 원작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 71년 10월. 국립극장. 고뇌하고 있는 인물상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처리했습니다.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의 티켓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의 티켓 ⓒ 강인춘

ⓒ 강인춘
ⓒ 강인춘
연극에 출연했던 (위 왼쪽부터) 김성옥, 백성희, 손숙, (아래 왼쪽부터) 백수련, 최선자, 윤여정, 김용림씨입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한창 젊었을 적 사진들입니다. 이 사진은 제 아내인 '김현실'이 찍었습니다. 당시 연극을 좋아해 좇아다녔던 사진학과 출신의 발랄한 아가씨였습니다.

ⓒ 강인춘
'산울림' 6회 공연 작품인 '제임스 골드맨' 원작의 '겨울 사자들' 72년 10월. 국립극장. 출연진: 김성옥, 김용림, 김무생, 이정길, 김인태, 윤소정, 남일우.
붓으로 휘갈겨 쓴 '로고'체와 판화식 디자인을 도입했습니다.

ⓒ 강인춘
'산울림' 8회 공연작품인 최인호 원작 '가위 바위 보!' 74년 5월. 예술극장
출연진: 김인태, 김무생, 오지명, 이성웅, 이정길, 김용림, 사미자, 손숙, 윤소정, 최선자 등. 로고와 그림전체를 추상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임영웅 선생님!
어떠세요? 지나간 세월과 현재가 '디졸브'되어 팔장을 끼고 두 눈을 감게 되지 않으세요? 지금쯤 신촌의 '산울림'극장 앞에서 백발을 손으로 치켜올리시면서 미소를 지으실 선생님을 생각하며 가까운 시일 내에 꼭 한번 찾아 뵙겠다고 다짐합니다.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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