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은 관계의 속성을 규정짓는다는 데서 호칭 파괴 바람도 분다. 대안교육을 하고 있는 간디학교의 학생들은 교사들을 '쌤'이라고 부른다. '선생님'을 줄인 약자다. 양희창 교장도 '양쌤'이다. 부르기 편하다는 이유 외에도 '쌤'이라는 말에는 각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호칭으로 완화해서 학생들이 마음을 열고 교사와 만나는 장을 마련하자는 것이 호칭 파괴의 목적이다.
안양공동육아협동조합은 취학전 아동들과 교사들이 별칭과 반말로 소통한다. 교사들은 각각 '아싸' '단풍' '참좋아' '사과' 등의 별칭으로 불린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부모들이 와서 교사 노릇을 할 때도 부모들에게는 각각 별칭이 주어지며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반말이 오간다.
"눈높이를 맞추는 거죠. 별칭을 사용함으로써 교사와 친해지고 놀이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교사에게 친구에게만 하는 비밀이야기도 곧잘 합니다."
아이들에게 '아싸'로 불리는 김은주씨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바탕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성 공동체 '줌마네'는 20~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각각을 부르는 호칭은 이름이 아니라 별칭이다. '노을이' '오소리' '예측불허' '마짱' '레드핫'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별칭이 서로 부르는 호칭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뒤에 '언니'를 따로 붙이지도 않는다. 그냥 '오소리'이다.
"이름에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별칭은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하죠. 그러려면 과거가 있는 이름은 부담스럽죠. 굳이 '언니'를 따로 붙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언니답게'를 강조하기 때문이에요.'언니'라고 불리는 순간 언니라고 불리는 사람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이에게 항상 언니다워야 하는 거죠."
줌마네 부대표 로리주희씨가 얘기하는 별칭의 취지다. 즉 별칭은 서로 배울 수 있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별칭은 모임을 진행하는 데 있어 윤활유 구실을 한다. 별칭을 통해 상호 평등한 관계를 모색하고 단체가 지향하는 평등한 사회를 향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더 재미있고 대등하며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2년 전 작고한 이오덕 옹은 자신보다 수십년 연배가 어린 사람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배움은 나이가 아니라 삶의 자세라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사례다.
우리 사회의 호칭은 소통의 문화에서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표현의 방식이 담고 있는 의미는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사례처럼 심오하다. 진심을 담을 수 있는 말, 상대를 배려하는 말도 인권 실현의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