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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나 나나 편히 살 팔자는 아닌가 보이."

장판수는 풍산으로 가는 도중에 몸살을 만나 잠시 묵어갔던 김가 노인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잡일을 도왔다. 장판수에게는 다행히도 창에 찔린 상처는 덧나지 않고 잘 아물었지만 예전 전투에서 상처 입은 곳을 다시 다친지라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걸음걸이가 남이 보기에도 눈에 띄도록 절룩이게 되어 의주로 가는 일정은 더디게 되었다.

"지금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될지 모르네. 밭일 따위를 돕겠다고 하지 말고 편히 쉬게나."

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판수는 부득불 자신의 고집대로 밥값은 하겠다며 노인의 밭일을 도와주었다. 노인은 행여 예전처럼 장판수의 마음가짐이 안이해진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장판수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노인장께서는 글을 배우신 분이니 무식하고 우매한 저보다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리라 봅네다. 이 일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해주십시오."

장판수는 풍산에서 두청과 나누었던 얘기와 남한산성에서의 일을 늘어놓은 후 노인에게 올바른 판단을 부탁하였다. 장판수에게 제발 쉬라고 말하며 안이해진 정신을 탓하던 노인은 막상 그 말에는 말을 흐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글을 배운 건 사실이지만 전란이후에 너무나 오랫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아 식견이 어둡기 그지없네. 그런데 자네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겠나?"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장판수는 고집스럽게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노인의 조언을 구했다.

"거 정말 내 말을 듣고 싶은겐가? 자네 마음이 흔들린다고 여기 눌러앉아 이럴 것까지 있는가!"

장판수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아닙네다 노인장! 분명히 말씀 드렸지만 내래 그런 놈들과 손을 잡고 행동하기는 싫습네다!"
"그렇다면 대체 뭔가? 진짜 정녕 어찌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인가?"
"그 놈들 말이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겪은 바를 미루어 봐서 전혀 틀린 말은 아닌 듯 싶습네다. 모조리 썩은 세상에 나 혼자 어찌 한다고 좋은 세상이 오겠습네까?"

노인은 하늘을 보고 '허허허' 크게 웃어 젖혔다.

"그렇다면 굳이 내게 물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네다. 내래 그들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들이 지금 나처럼 흔들린다면 어찌 해야겠습네까? 무슨 말로 명분을 세워야 겠습네까?

노인은 평안한 눈빛으로 장판수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들이 내거는 명분이라야 저 한양에 있는 양반네들처럼 명나라에 대한 의리니 대의명분이니 할지도 모른다네."
"전 명나라 놈들과 그런 명분으로 손을 잡긴 싫습네다. 그 놈들이래 제 아비를 죽인 원수들의 나라입네다."

이미 장판수의 얘기를 들어 이를 알고 있는 터라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네 아비의 원수가 아닐지라도 명에 대한 의리니 하는 말로 백성들의 피폐함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네. 아마 한양에 있는 양반네들이 이 말을 들으면 하늘이 무너져라 길길이 뛸 테지만 말이야. 허허허…."

노인은 잠시 쿨럭이더니 이윽고 숨을 못 쉴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기침을 해대었다. 당황한 장판수는 노인의 등을 살살 두드리며 몸 상태를 물었다.

"괜찮네. 가끔 이러니 원. 할망구보다 먼저 가서는 안 되는데."

노인은 소매로 입가를 닦은 후 바위에 걸터앉아 얘기를 마저 했다.

"거창하게 따질 것 없네. 자네가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일세. 자신을 위할 것인가, 남을 위할 것인가? 자신을 위하겠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잊고 조용히 살면 되네. 남을 위하는 길로 가겠다면 그에 상응해서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는 말게나. 조금의 이익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후세에 자신의 자랑스러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수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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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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