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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은행나무길,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 김정은
소백산 기슭 부석사에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미처 노랗게 물들지 못한 은행나무의 은행잎들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어둠에 황급히 제 몸을 가리고 경내의 촉수 낮은 가로등이 어스름한 어둠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이맘때 다시 오리라는 약속은 지켰으나 아무래도 내 맘 같지 않은 은행나무잎들은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히 온 나의 조급증을 나무라는 듯하다.

▲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부석사의 북소리, 북소리를 들으며 그 애를 생각했다.
ⓒ 김정은
마침 범종각에서 북이 울린다. 서운한 마음이 들킬까봐 꽁꽁 닫힌 마음의 틈 속을 비집고 자꾸만 북소리가 울린다. 울림은 어느새 내 심장 박동에 맞춰 진동하고, 내 심장박동은 자꾸만 커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 108 계단을 따라 안양문에 올라 비로소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에 도달한다.
ⓒ 김정은
문득 그 애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단짝 친구였던 그 애. 나를 많이 화나게도 만들었지만 그보다는 기쁜 일이 더 많았던 같은 동네 친구. 언젠가 이사를 가버린 이후부터 만나지 못하다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우연히 그 친구를 보았다. 조용한 사찰 대웅전 한 귀퉁이에 밝게 웃고 있는 친구의 흑백 영정.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슬금슬금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종내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 어둠이 깃든 탑 주변
ⓒ 김정은
북소리가 끊기고 어느새 범종소리가 들린다. 거칠게 뛰었던 심장의 고동소리도 어느새 북소리처럼 사그라졌다. 그 애의 영혼 또한 이 종소리에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며 종소리를 따라 108 계단을 따라 안양문에 올랐다. 그제야 비로소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에 도달한다.

▲ 무량수전에 불이 켜지면 사바의 세계인 이곳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김정은
안양루 너머로 바라보이는 이승의 세계는 이제 어둠 뿐이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구불구불 이어진 능선의 바다 또한 피곤했던 하루의 휴식을 위해 어둠을 베개 삼아 조용히 잠들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사바의 세계인 이곳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무량수전 법당 안에 불이 켜지고 서라벌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아미타여래의 얼굴에도 어느덧 빛이 나기 시작한다.

▲ 서라벌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아미타여래의 얼굴에 빛이 떠돈다.
ⓒ 김정은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어둠을 깨운다. 지난번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저 멀리 안양문 아래 능선으로 굽이치는 무욕의 바다를 굽어보며 나 자신에게 했던 다짐 아닌 다짐을 아미타여래를 보며 다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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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구걸하지 말되 절망에 꽁무니를 보이지 말자. 권태에 조급하지 말되 나태하지 말자."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이른 저녁,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반겼다는 무량수전은 몸단장을 곱게 한 누이가 오랜만에 온 동생을 버선발로 반기듯 사방에 환한 빛을 밝히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 역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복받치는 고마움으로 올 때마다 또 다른 모습과 색깔로 반겨주는 부석사, 그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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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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