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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찾사 앨범 자켓에 쓴 사진.
ⓒ 노래를찾는사람들
1992년 ‘끝나지 않은 노래’라는 이름이 붙은 노찾사의 공연에 갔을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너무도 유명한 노찾사의 앨범(그 유명한 노찾사의 앨범 재킷 디자인은 김민기의 친구이자 연극 연출가이며 광고 기획자이기도 하던 이상우가 맡았다)을 언니가 집에 들고 왔을 때, “여기 뻥뻥 뚫려 있는 하얀 사람들은 뭐야? 죽은 사람들인가?”하고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지. 왠지 무서워 보였던 그 음반을 중학생이었던 나는 언니보다 더 열심히 들었다. 초등 학생 때 이미 ‘아침이슬’과 ‘작은 연못’을 대학생이었던 언니에게 배웠던 나. 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 ‘의식화’ 하나는 참 제대로 시켰던 언니였다.

어쨌든, 음반으로만 들었던 노찾사의 노래를 제대로 들을 기회가 생겼는데 비껴 갈 수가 없어서 그 공연에 가슴을 설레면서 찾아갔다.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전교조 선생님들도 보였고, 문학 동아리 사람들도 보였고, 학교 밖 모임에서 만났던 선배들과 친구들도 여럿 만났다.

ⓒ 노래를찾는사람들
노찾사의 공연은 충격이었다. 집회장에 온 것인지, 아니면 공연장에 온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분위기였다. 무대 위의 노찾사와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누가 가수인지, 누가 관객인지 모를 정도였지. 노래 한 곡이 나올 때마다 결연한 자세로 주먹을 들고 일어나 함께 따라 부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가슴이 뛰었다. 노찾사 사람들의 육성을 그대로 들으면서, 내 몸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은, 심장에 바로 꽂히는 노래들은 공연 내내 나를 비장하게 만들었다.

지방에 살면서 노찾사를 집회장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학교 축제 때도 노찾사보다는 ‘천지인’이나 ‘바리케이트’나 ‘안치환’ 같은 이들의 공연이 훨씬 더 각광을 받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공연에서 노찾사를 만나지 못했던 기간 동안 노찾사도 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하고 있었다.

▲ 다시 뭉친 노찾사.
ⓒ 노래를찾는사람들
그리고 10년이 더 지난 토요일(10월 8일), 노찾사 20주년 기념 공연에 다녀왔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노랫말에 두근거렸던 십대를 지나고, 나는 이제 ‘잔치가 끝났다’는 선언을 들으면 괜히 화가 나는 삼십대가 되어 있다.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친구에게, “이 노래들, 이렇게 아름답게만 들려도 되는 거야?” 나는 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내 심장을 다시 떨리게 하는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테너 임정현이 부른, 가슴 아프게 아름다운 ‘이 산하에’를 들으면서 나도, 다른 관객들도 더 이상은 주먹을 치켜들지 않고 있었다.

공연장에 온 사람들은 아나운서 손석희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으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를 발견하고는 ‘야, 진짜 여러 공연장에서 얼굴 본다’ 하는 친구도 있었고, 서울에 올라와 활동하는 대학 선배들 얼굴도 만났고, 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심지어 내 친구는 헤어진 남자친구의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노래의 기억이 때로, 씁쓸한 첫사랑의 아픔처럼 떠오른다는 누군가의 말이 그렇게 어울리는 순간이 또 있을까?

더 이상 사람들은 노찾사의 공연장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질 때도 주먹을 올리기보다는 박수를 치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린 아들을 공연장에 데리고 온 엄마들은 아이가 이 노래들을 투쟁과 혁명으로 기억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서정으로만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를 귀로 감상하기만 하는 것이 너무도 어색했던 나. 가슴이 뛰면서도 공연 중간 중간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던 내게 노찾사 20주년 공연에 즈음해서 나온 이 책 <노래를 찾는 사람들 지금 여기에서>는 해답을 주고 있다.

ⓒ 호미출판사
“지나간 시절의 영광을 반추하려는 게 아니라, 노래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아파하고 기뻐하고 어루만져 줘야 하겠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더욱 건강하게 지켜 나가기 위함입니다.”(노찾사 대표 한동헌, ‘다시 불씨를 놓으며’-6쪽)

“노래운동의 본령은 공연이나 운동 현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장은 작곡과 공연의 현장이고, 현장은 작곡과 공연의 현장이고, 공연은 계기일 뿐이며, 노래운동의 본령은 공연과 현장 이후 자유 시간의 정서적 재조직이다.” (김정환, 24쪽)

“앞 세대는 늘 뒷 세대에게 무겁다. 운동의 앞 세대 또한 뒷 세대에게 늘 무겁다. 그렇다면, 무거움을 벗어야 하는가? 아니다. 무거움이 스스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노래운동은 음악의 길을 따라, 더 가야 한다. 무거운 짐이 자연스러워질 때 그것은 후대에게 의미의 아름다움이 된다.” (김정환, 27쪽)


“노찾사가 없어도 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노래하자고 약속했던 그들은, 아직은 활동을 접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후대에게 ‘의미의 아름다움’이 되어 준다는 김정환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내 불편했던 마음 한 자락을 접어도 되는 것인가, 되묻게 된다. 20주년 무대에 선 노찾사 사람들도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노래는 아름답기만 했던 것일까요?”

투쟁의 현장을 떠나, 이제는 무대 위에 다시 선 노찾사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 나는 궁금해진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그 날이 오면, 이 산하에, 잠들지 않는 남도,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녹두꽃, 의연한 산하, 선언,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슬퍼서 아름다웠던,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던 노래들을 다시 들으면서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던 월터 페이터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노찾사는 원했던 원하지 않았건, 그런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80년대를 붙잡고 있었던 집단이며 가장 늦게까지 80년대의 기억을 환기시켜 준 하나의 상징이었다.” (김창남, 104쪽)

나는 너무 지나친 기대를 안고 이 공연장을 찾았던 것인가? 이제는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 사람들의 물결이 공연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차해도 되는 것 아니었을까? 2005년, 노찾사의 공연에서 주먹을 들지 않아도 될 만큼, 꼭 그만큼 이 땅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온 것이라 반가워했으면 되는 것 아니었을까? 나는 다만, 과거에 사로잡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기껍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나간 시절에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낸 노찾사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나의 가슴이 아직도 뜨거워진다는 사실에 조금쯤 기뻐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나가고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면 되는 건 아니었을까?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바꾸어야 할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새로운 실천의 출발이다.” (김창남, 105쪽)

책을 읽으면서 나는 괜히 혼자 부끄러웠다.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도 할 줄 몰랐던 나의 무지가 말이다.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노래가 없는 세월’을 살고 나왔던 신영복 선생이 노찾사의 노래를 들으면서 ‘거칠지 않은 전투성’과 ‘감상적이지 않은 서정성’에 탄복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노래는 나의 힘’을 쓴 조효제 교수의 유쾌하고도 발랄한 회고담을 읽으면서, 김창남 교수의 준열한 글을 읽으면서, 김정환이 쓴, 어렵지만 명쾌한 글을 읽으면서, ‘퀴즈 아카데미’에 ‘사계’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를 내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학가요제 무대에 노찾사를 세우고 뿌듯해했던 주철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한때 ‘노찾사’였거나 혹은 여전히 ‘노찾사’인 사람들이 쓴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 우린, 가난했지만 정말 투명했었지.”(153쪽, 권진원) 하는 고백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 20주년 기념 자료집으로 끝나지 않고 이 이야기들이 제대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다시 돌아온 건가요? 그때 그 마음 그대로인가요? 보고 싶네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온 건지…….” (ddj002)

▲ 2집과 3집을 묶어 다시 낸 앨범.
ⓒ 노래를찾는사람들
노찾사는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 마음 그대로인가요?’ 묻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응원과 기대, 혹은 우려를 딛고 그들은 무대에 다시 섰다. 다시 묶어 낸 노찾사 2, 3집이 겨우 몇 천 장도 안 팔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가? 아직도 그네들의 노래를 들으며 가슴이 뛰는 관객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이다.

가끔, 아주 가끔은 사람들과 노래방에 가서 ‘광야에서’를 부르고 헤어질 때가 있다. 분위기 죽는다고 말리는데도 한사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번호를 찍어서 부르는 사람들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사회대 앞 잔디밭에서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면서 눈물 흘리던 순정한 청춘들을 기억하고 있고, 인문대 뒤 동산에서 담배 연기에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흘려 보내던 시간들을 나는 지나왔다. 아직은 세상의 작은 변화들을 꿈꾸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고, 노래가 불꽃처럼 빛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고, ‘말이 꽃처럼 피어나는 노래들’을 부르면서 두근대는 영원한 청춘에 머물러 있고 싶은 바보 같은 바람을 지니면서 살고 싶기 때문에 나는 노찾사의 노래들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 노래를찾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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