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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말했다. "우리가 작년 말 국가보안법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이런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맞다. 최근의 몇 가지 사건을 관류하는 본질은 국가보안법이다.
박 대표는 강정구 둥국대 교수의 "6.25는 통일전쟁" 발언만을 언급했지만 어디 그뿐이겠는가. 보수언론이 개탄을 금치 못한 몇 가지 사안들, 즉 간첩 전력을 갖고 있는 10명(또는 5명)이 '금강산 통일기행' 행사에 참석했고, '아리랑' 참관단 일부가 북한을 찬양하는 책과 CD를 대거 반입했는데도 당국은 손발 다 놓고 있었다는 것도 국보법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예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표현대로 이런 행위들이 "시대착오적 좌경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국기문란행위"라면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국보법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최근의 몇 가지 "국기문란행위"를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집중 부각시키는 데에는 국보법에 링거를 꽂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다는 뜻도 될 터이다.
국보법에 링거 꽂으려는 보수언론과 한나라당
이제 따지기만 하면 된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문제 삼은 "국기문란행위"는 오로지 국보법을 동원해야만 제어 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체제도전행위"인가?
지난해 국보법 철폐논쟁이 빚어졌을 때 한나라당이 마련한 국보법 개정안의 내용은 이렇다. ▲불고지죄는 처벌대상에서 제외 ▲찬양·고무행위는 적극적인 선전선동에 한해 처벌하되 단순한 찬양·고무·동조 행위는 처벌대상에서 제외 ▲찬양·고무와 함께 통신·회합행위도 명백히 이적 목적이 있을 경우에 한정해 처벌….
박 대표가 "지켜내지 못했으면 속수무책일 뻔 했다"고 칭송한 국보법의 내용은 이것이다. 달리 해석하자면 최근 나타난 일련의 "국기문란행위"는 한나라당이 마련한 국보법 개정안의 틀을 뛰어넘는 심각한 '체제도전행위'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간첩 경력을 갖고 있는 10명(또는 5명)이 북한 영토인 금강산에 간 목적은 '통일기행'이었다. 그들이 '통일기행'을 하면서 어떤 생각과 행위를 했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조선일보>가 대표사례로 크게 보도한 김영승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6.25때 국군 5명을 살해한 김영승씨는 '통일기행' 참관후기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그 내용 중 이런 구절이 포함돼 있다. "우리는 (올해를) 자주통일 원년, 미군철수 원년으로 바라보고 있다. 감옥에 들어갈 각오로 싸워야 한다."
한나라당이나 보수언론으로서는 듣기 섬뜩한 체제전복 주장일 수 있다. 한나라당의 국보법 개정안대로 단순한 찬양·고무행위를 넘어 적극적인 선전·선동행위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자주통일·미군철수" 원년을 열기 위해 구체적으로 조직활동을 했다는 확증은 없다. '금강산 통일기행' 참가 목적이 "자주통일·미군철수"를 이루기 위해 북측 인사와 '회합·통신'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는 증좌도 없다.
강정구 교수 주장 '그저 그의 주장'일 뿐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딱 하나다. 그가 "자주통일·미군철수" 주장을 범민련 홈페이지에 올린 행동을 단순한 찬양·고무행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 선전·선동행위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보수언론은 "그렇다"라고 외치고 싶겠지만 근거는 약하다. 북한 주장과 흡사하므로 이적성이 있는 선전·선동행위라고 규정하고 이게 일반화되면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는 위축되고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은 줄을 서게 된다.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김영승씨의 주장은 '자기 사상에 투철한 한 노인의 일방적 주장'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강정구 교수의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숱한 사람들이 백가쟁명식으로 주장을 쏟아낸 뒤끝이라 여기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지만, 굳이 첨언한다면 강 교수의 주장은 '그저 그의 주장'일 뿐이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공개된 매체를 통해 주장을 한 점을 한나라당이나 보수언론은 문제 삼고 있지만 이 또한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강 교수의 '오도된 주장'이 미칠 파장을 우려하고 있지만 그건 전적으로 강 교수의 주장을 듣고 읽은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다.
한나라당이 불고지죄를 처벌대상에서 제외한 이유가 뭐겠는가? 무엇보다도 이른바 '간첩'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 고민'을 고려한 결과이겠지만 단지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다. 설령 그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나는 간첩이요'라고 밝히면서 세뇌하려고 해도 그것을 여과할 만한 국민의 역사적 인식이 성숙됐다는 판단을 했기에 불고지죄 삭제를 추진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리랑' 공연 참관단 일부가 북한을 찬양하는 책과 CD를 갖고 돌아온 행위는 더 간명하다. 이들이 책과 CD를 대량 복사해 배포하고, 이를 통해 어떤 조직적 연계를 꾀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행위를 할 시간적 여유도 전혀 없었다.
단순 찬양·고무 면죄하자던 한나라당이 이적표현물 소지를 문제삼다니...
그럼 단지 이적표현물 소지·탐독 정도의 행위에 국한되는 것인데, 단순한 찬양·고무행위를 면죄하기로 한 한나라당이 이를 문제 삼는 건 겸연쩍은 일이다.
한나라당이 국보법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면죄와 처벌을 가르는 기준으로 제시한 '이적성'만 놓고 보면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국기문란행위" 축에도 끼기 힘들다. 북한에 전력 200만kWH를 제공하려는 정부, 그리고 한때 수억 달러를 들여 북한에 중유를 제공한 미국과 일본처럼 이적행위를 '버젓이 자행한' 주체도 없다. 한국 정부나 미국 일본의 에너지 지원은 대남적화통일노선을 지도강령으로 떠받드는 북한정권의 지배력을 유지·강화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대북 전력지원을 인정했고, 중유 공급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아이러니요 한나라당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되돌아 봐야 한다. 몇몇 인사를 향해 "너 빨갱이지?"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국보법 개정안의 '이적성'이 얼마나 정밀하고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국보법 철폐논쟁이 빚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해온, 부인할 수 없는 '악용' 경험 때문이란 점을 인정한다면 국보법 조문을 껴안고 안도의 숨을 쉴 게 아니라 조문 하나하나를 되짚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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