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은 특이한 인물이다. 그 자신이 그것을 인정할지 어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그는 한 가지 특징만으로 특이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좌파를 자처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말이다. 기실 그의 이름이 ‘B급 좌파’로 통하고 있으니, 그의 글이 온통 빨간색으로 덧칠되어져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건 괜한 생각이 아니리라.
그의 글을 빨갛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또한 좌파를 자처한다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멀리 볼 것도 없이 근현대사만 살펴봐도 그 모든 건 ‘불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렇다. 그래서 그는 신념대로 좌파를 자처하고, 그에 따라서 글을 쓸 뿐인데 세상은 그를 불온하다며 특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규정한 특징들 때문에 그의 존재는 더욱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불온한 것에 대한 인간들의 관심사가 지극하다는 것은 물론, 그의 특이한 글은 아무데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기에 <나는 왜 불온한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정작 그는 세상이 불온하다고 말하건 말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나는 왜 불온한가>에서도 강조되듯 한국 사회 속에서의 진보가 내딛는 발걸음이다.
진보라는 단어는 상투적으로 들릴 여지가 크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 탄핵사건을 기점으로 ‘개혁’과 ‘진보’가 얼마나 빈번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가. 그런데 그조차 진보를 말하니 희귀한 걸 기대한 사람들은 적잖이 실망할 수도 있을 테다. 허나 속단은 금물이다. 그가 말하는 진보와 유행가처럼 길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진보와는 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 기실 이러한 차이는 그의 글이 갖는 희귀성이 진가를 발휘하게 만들고 있다.
먼저 그가 말하는 진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보의 진정한 의미다. 그렇다면 언론을 오르내리며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을 위시한 개혁론자들이 말하는 진보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건 ‘가짜’다. 굳이 말하면 ‘개혁’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개혁과 진보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진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개혁은 세상을 테두리 안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요즘의 개혁은 기득권자들이 편하게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의 약자들이 살 만할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진보가 필요한 것이다.
사례를 들어 보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정권이 바뀌기 직전부터 진보와 개혁이 유행처럼 퍼지면서 한나라당은 보수, 열린우리당은 진보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민주노동당은 괴상한 기준에 따라서 진보라는 용어도 아닌 ‘극좌’라는 정체성으로 동일선상에서 평가받지 못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이러한 평가 기준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중요한 시기마다 이렇게 의도된 헷갈림이 나타나 사람들과 사회의 머릿속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여지가 농후한데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진정한 진보가 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정치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진보와 개혁을 헷갈리게 하는 것과 같은 의도된 혼미성은 도처에 존재한다. 가령 인터넷을 통해 등장한 논객들이 그러할 테다. <나는 왜 불온한가>는 그들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 측은함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만들어진 판 안에서만 마음껏 떠들기만 하고, 그 안에서만 만족할 뿐이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문제에서 그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시민단체들이 선거철에 보여줬던 낙선운동과 주류 페미니스트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감추지 않는데 이유는 한결 같다. 그는 <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시민단체들은 ‘시민의 힘’을 보여주자고 하지만 시민임에도 시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의 문제는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으며 주류 페미니스트들 역시 중산층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에 갇혀 빈민이나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여성들과 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더불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한국의 ‘교회’도 있다. 그는 한국의 교회는 ‘상점’이 됐다고 비판한다. 없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가 보여줬던 그 모습들은 온데간데없고 권력을 누리며 있는 자들을 위해 움직이고 돈을 따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을 근거로 한 그의 말들은 하나같이 타당한 논거가 되고 있다. 교회를 비판한 말에 불끈한 이들도 그의 말을 찬찬히 듣고 있으면 뜨끔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이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다루는 것들은 하나같이 ‘불온’하다 말할 만하다. 대중이 ‘옳다’고 믿어지는 내용들에서 비껴나 있는 것은 물론 성역과도 같은 곳에도 과감한 비판의 날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온한 그의 글이 갖는 가치까지 불온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게다. 오히려 빛난다고 해야 맞을 게다.
‘싸우지 말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뻔한 소리보다 ‘썩어빠진 그 작자들을 몰아내자’라고 말하는 그것이 필요한 때가 오늘의 시대다. <나는 왜 불온한가>는 그 말을 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대중을 의식해 아부하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진정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한걸음 앞으로, 한걸음 왼쪽으로 움직이길 꿈꾸는 <나는 왜 불온한가>는 영락없는 문제작이다. 최근에 이처럼 문제의식으로 똘똘 뭉친 문제작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할 만큼 그 수위가 높다. 그래서일까. 수위가 높은 만큼 더욱 반갑다. 불꽃이 있어야만 불이 타오를 수 있듯 문제작이 있어야만 문제가 터져 나올 수 있다. 더군다나 <나는 왜 불온한가>가 건드리는 문제의 끝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진실로’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것이니 더욱 반갑다. 반가운 문제작의 등장이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
|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돌베개(2005)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