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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소충사의 이석용 의병대장
임실 소충사의 이석용 의병대장 ⓒ 박도

남원 만인의총

담양 고광순 의병장 무덤에 참배하다
담양 고광순 의병장 무덤에 참배하다 ⓒ 박도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 이튿날(10월 1일) 아침, 숙소에서 일어난 뒤 아침 산책을 겸하여 고광순 의병장이 편히 잠들고 계시는 월봉산 노적봉 아래로 갔다. 고광순 의병장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 ‧ 고종후 ‧ 고인후 3부자의 후예다. 의병 명문가에서 300여 년의 세월을 두고 다시 의병장이 태어난 셈이다.

1848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고광순 의병장은 48세 되던 1895년에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이 일어나자 기우만 기삼연 등 호남지방 유림들과 창의하여 10여 년 일제 군경과 맞서 싸우다가 1907년 10월 16일 연곡사에서 결사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담양군에서 고광순 의사 기념관을 짓고 있는바, 준공 전이라 사당 참배는 못하고 후손 고영준 선생의 안내로 산소에만 헌화 묵념을 드리고 발길을 돌렸다.

숙소 옆 밥집에서 아침을 들고서 다시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 길에 나섰다.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은 볼거리가 지천으로 많아서 몇 날은 머물러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병선양회 윤 회장은 주차간산(走車看山)이라도 하자고 하여 유서 깊은 담양의 고적들을 훑었다.

소쇄원 광풍각
소쇄원 광풍각 ⓒ 박도
창평을 출발한 버스는 곧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지나 광주호 옆의 식영정에 머물고는 가사문학관, 소쇄원을 '구름에 달 가듯이' 둘러보고서 부지런히 달려간 곳이 장성읍이었다. 곧장 읍시가지 동산에 있는 기삼연 의병장 순국비를 찾아 묵념을 드렸다.

기삼연 의병장은 185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난 유림으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장성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창의하여 고창 문수산, 영광 법성포, 장성 백양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담양 추월산성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 중 체포되어 1908년 순국하였다.

필자는 사진 촬영을 하고자 비문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누군가가 비문에 스프레이를 칠했는지 손상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관계 당국자의 세심한 관리가 아쉽다.

기삼연 의병장 순국비에 참배하는 의병선양회원
기삼연 의병장 순국비에 참배하는 의병선양회원 ⓒ 박도
장성에서 다시 북행하여 머문 곳이 남원 만인의총이었다. 광복회 전라북도 이영철 지부장께서 우리 일행을 영접해 주시고 앞장서셨다. 여러 사적지를 둘러보았지만 이곳 '만인의총'이 가장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어디 하나 흠 잡을 곳 없을 정도로 깨끔하게 정비되었다. 사적지 구석구석과 돌계단에는 노란 국화 분을 갖다놓아서 추국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하였다. '만인의총'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 관 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남원은 호남의 곡창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선조30년(1597) 8월, 5만6천의 왜군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안에는 정기원 이복남의 지휘아래 민 관 군이 굳게 뭉쳐 성을 방어하였다. 결국 성이 함락되어 거의 만 명에 달하는 민 관 군이 죽음을 맞았다. … 난이 끝난 뒤에 순절한 이들을 한 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사당을 지었다.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렬사라고 이름지었다. …

남원 '만인의총'
남원 '만인의총' ⓒ 박도
충렬사에 참배하는 의병선양회원들
충렬사에 참배하는 의병선양회원들 ⓒ 박도

임실 소충사

조세현 의병선양회 부회장
조세현 의병선양회 부회장 ⓒ 박도
다음 순례지는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산 기슭에 있는 소충사였다. 이곳은 호남의병장 이석용 장군을 중심으로 장군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한 28의사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었다. 우리 일행이 참배를 끝내고 곧장 갈 길을 서둘자 후손 이명근 선생이 점심 대접도 못하고 보낸다면서 못내 섭섭해 하셨다. 점심은 이미 마이산 들머리에 예약이 돼 있었기에 호의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마이산 들머리 밥집에서 뒤늦게 마음에 점을 찍고 마지막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로 정한 이산묘에 참배를 드린 뒤 곧장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첫날 늦은 시간으로 어등산 전적지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여 못내 서운한 조세현 의병선양회 부회장이 할아버지 조경환 의병장 순국 일화를 전하였다.

1909년 음력 섣달, 조경환 의병장은 어등산 사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교전 중, 적탄 두 발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그런 가운데도 조 의병장은 품안에 간직한 의병진 명단을 일제 헌병대에게 넘겨줄 수 없어서 입으로 씹어 삼키려다가 기진하여 다시 성냥으로 불사른 뒤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대천 조경환 의병장 영정
대천 조경환 의병장 영정 ⓒ 조세현
그로 인해 조 의병장 순국 후 부하들과 동지들은 후환이 없었다고 하니 끝까지 부하를 지키는 그 의리에 가슴이 뭉클하다. 그때 당신의 춘추 33세였다고 한다. 누구는 동지를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는데 그분의 의로운 죽음은 새길수록 거룩하다.

"생전의 할머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이 오실 때를 맞춰 토지문서와 옷 한 벌을 장만해 뒀다는데, 한밤중에 몰래 와서 잠시 머물고는 옷을 갈아입고 토지 문서를 들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하였답니다."

조세현 부회장의 회고담이 내 마음을 울렸다. 조경환 의병대장이 남긴 어록이라고 한다.

"不滅島夷 惟魂不復"
(불멸도이 유혼불부; 섬나라 왜놈이 멸망치 않으면 내 죽어 혼백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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