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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모처럼 양동마을에 생기가 돈다.
ⓒ 한석종

▲ 들판엔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마을 고샅엔 아이들로 넘쳐나 비로소 사람사는 동네로다
ⓒ 한석종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모처럼 생동감 넘치는 양동마을

그토록 푸르고 싱그럽던 남도의 온 산하가 형형색색의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추수의 끝마무리가 한창인 남도 들녘을 고추잠자리가 분주하게 비행하고 있는 그 자리마다 하늘은 드높고 청명하다.

지난 주 "아키에듀포럼" 회원들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형태와 그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양동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분위기가 다른 마을과는 다르게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다. 대부분 민속마을을 답사해 보면 아이들은 고사하고 좀처럼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아 고적하기 마련인데 이번 양동마을 답사는 그런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마을 어귀 한편 천여 평 남짓한 빈 공간에서 체험학습 온 수십 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힘차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곳에는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소, 그네, 농구대 등 어느 놀이기구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우리가 소싯적에 놀던 방식으로 줄넘기, 술래잡기, 말뚝박기 등을 하며 서로 몸을 부대끼며 놀 수밖에 없었다. 이런 놀이공간이 생소하고 어색할 법도 할텐데 아이들은 금방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면서 놀고 있었다.

▲ 향단 행랑채 쪽문에서 바라본 시원한 강동벌안
ⓒ 한석종
양동마을의 지세

양동 마을의 진입로는 경사가 급한 산으로 반쯤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마을의 뒤 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 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 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안으로 철로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勿’자 형국의 특성은 겨울철에 찬바람을 막아주어 추위가 덜하다는 것이다. 또 네 군데 언덕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겨울 바람이 양동마을에 이르러 온순해질 수밖에 없다. 또 언덕 높이가 해발 50∼70m여서 여름에는 시원하기 그지없다.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있다. 이런 골짜기와 능선마다 기와집과 초가가 잘 어울려 살고 있다.

마을 번성기에는 600~700여 채에 달하던 마을이 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줄어 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 160여 호로 감소되었지만 아직도 전통가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민속마을이다.

▲ 저 빈 항아리 속에 구수하게 익어가는 된장이 다시 채워질 날 그 언제뇨?
ⓒ 한석종
양동마을의 가옥 특성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경주 양동마을에 자리잡은 대부분 고택은 신분의 위계에 따라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 그 손들의 가옥이 단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그 규모 또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차 작아지며, 맨 아래 평지에는 외거노비가 기거한 '가립집'이 위치하고 있어 유교적인 신분질서가 공간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손(孫)씨의 대종택 서백당(書百堂)은 마을입구에서 안쪽으로 상당히 접어든 언덕배기 중턱에 입체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서백당은 ‘勿’자 형국의 양동마을에서 가장 뒤쪽, 그러니까 가장 배후에 풍수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선점한 셈이다.

손씨 집안이 양동마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양민공 손소(孫昭·1433∼84) 때다. 1300평의 대지에 사랑채와 안채를 합해 33∼34칸에 이르는 서백당은 다른 고택들과 비교해보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흔히 ‘서백당’이라 불리는 경주 손씨 대종택은 20대, 550년의 역사를 지녔다. ‘서백(書百)’은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의미로 손씨 집안의 대종택을 지키는 종손이라면 그 만큼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서백당 다음으로 찾은 곳은 ‘향단(香壇)’. 화려한 지붕의 이 건물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1543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올 때 중종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지어 준 집이다.

원래 향단은 흥(興)자 모양의 99칸 집이었으나 일부는 소실되어 1976년 보수하면서 56칸으로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부구조가 화려하고, 치밀하여 그 화려함과 세도를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는 빼어난 가옥으로 건축학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성종 때의 명신 우재 손중돈 선생이 살던 ‘관가정(觀稼亭)’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가정에 들어서자 대문 아래로 펼쳐진 형산강과 강동벌안의 모습이 가히 일품이다.

관가정은 밖에서 보면 一자형 집이던 것이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口자 형태로 바뀐다. 가옥의 중앙에 위치한 마당에는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들어와 놀고 있었다.

폐쇄적인 네모난 마당에서 사랑채로 들면 사랑방은 다시 외부로 트여 있는 정자로 이어진다. 정자에서 바라본 가을 운치에 객(客)은 문설주를 잡고 여기에 그만 짐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가옥과는 달리 관가정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점점 쇠락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집은 사람을 품어야 생기가 도는 것을.

▲ 손씨 집안의 대종가 서백당, 어디선가 어른의 가르침이 들려오는듯 하다.
ⓒ 한석종

▲ 향단 사랑채에서 바라본 마을 어귀, 누렇게 익어가는 벼와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잘도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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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건물(교회)의 위세에 놀란 초가, 전통민속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게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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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아리 뚜껑이 죄다 열려있는 걸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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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가정 사랑채에서 바라본 시원한 눈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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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신분의 질서에 따라 배치된 가옥의 형태지만 서로를 배려한듯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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