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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담사 앞 다리위의 인파
ⓒ 김영명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전계곡의 용소폭포를 보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가랑비가 옷 젖기 좋을 만큼 내리고 있다.

아침식사는 호텔 내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식당주인의 말에 의하면, 설악산에서 자생하는 자연송이로 음식을 장만한단다. 자연송이 해장국(7000원)을 주문했다.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따라 나오는 머루술 한 잔이 입에 착 붙는다.

여유있게 아침밥을 먹고 나오니 시간은 오전 9시 반경, 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햇살이 언 뜻 언뜻 보인다. 다시 한계령을 넘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색동옷 남설악의 산세를 감상한다. 여기는 노랑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 만해의 흉상과 시비
ⓒ 김영명
가파른 계단을 올라 한계령 전망대에 서 본다. 어제는 짙은 운무 때문에 남설악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또 동쪽에서 쏟아내는 아침 햇살(역광) 때문에 전경이 흑백 필름이다. 한계령휴게소의 경치는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가보다.

백담사로 가기 위해 어제 왔던 길을 역으로 해서 한계령을 내려왔다. 다시 한계리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46번 도로(미시령 방향)를 달린다. 개천(북천)을 따라 북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백담사휴게소가 보이고, 이어서 용대3거리가 나온다. 3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약 900m 들어가면 백담사주차장이 나오고, 다시 주차장에서 500m 더 걸어서 백담사국립공원 매표소에 닿는다.

▲ 백담사 계곡의 단풍
ⓒ 김영명
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는 6km. 걸어서는 약 1시간 20분, 버스로는 15분 걸린다고 관리공단에서 발행한 팸플릿에 친절하게 적어놓고 있다. 버스를 타기로 했다.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버스는 편도 2000원(어른)을 받는다.

백담계곡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좁은 차도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성수기라서 20분의 배차시간도 무시하고 승객이 차면 차가 출발하기 때문에 버스가 빈번하게 오고 간다. 그 사이로 도보 등산객들이 아슬아슬 하게 차를 피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또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계곡의 단풍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구비를 돌 때마다 나는 탄성을 지르고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댔다. 진정 단풍의 진수를 맛보려면 버스를 타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획 지나가 버리는 절경에 아쉬움만 남는다.

▲ 이름 모르는 봉우리에서 쏟아지는 폭포
ⓒ 김영명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 기념관을 둘러본다. 일제시대 옥고 중에 옥중 투쟁 3가지 원칙을 게시한 것을 보면서 만해의 인격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첫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라, 둘째 사식을 취하지 말라, 셋째 변호사를 대지 말라.

재임 중 천문학적인 부정한 정치자금을 착복하여 징벌을 당하고 추징금 수천억원의 판결을 받고는 '내 가진 돈은 저금통장의 29만원밖에 없다'고 배짱을 내민 모 전직 대통령의 흔적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시대는 달랐지만 묘하게도 극과 극의 전혀 다른 삶을 산 두 분의 발자취를 이 곳에서 대비해 볼 수 있게 한 것은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만해의 시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전문이 돌비석에 새겨져 만해 기념관 앞 마당에 세워져 있다. 여기에 적어본다.

▲ 노래소리가 요란하던 미시령휴게소
ⓒ 김영명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백담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한 번 더 계곡의 단풍들을 눈에 담는다. 11시 30분경 백담사매표소와 버스승차장은 버스를 타려는 사람의 행렬이 100m 가량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마터면 우리 일행도 조금만 늦어서도 여기서 시간낭비가 클 뻔했는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울산바위의 위용
ⓒ 김영명
용대3거리로 다시 나와서 미시령 방향으로 달린다. 진부령 방향과 미시령 방향이 갈라지는 3거리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외롭게 서 있는데 그 봉우리 끝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면서, 부는 바람에 물방울이 사방으로 빗물같이 흩어지는 장관을 보았다. 이게 무슨 폭포인가? 궁금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여유도 없이 미시령 휴게소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미시령 휴게소 스피커에서는 누구의 노래인지 모를 우리 가요곡이 크게 쩡쩡 울려대고 있었다. 이 좋은 설악산 속까지 와서 강요된 음악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지, 휴게소 관리자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 된다.

구름 사이로 동해바다와 속초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미시령에서 시끄러운(?) 노래에 쫓겨나서 내리막길을 달린다. 내려가는 도중 오른 편으로 눈을 돌리니 거대한 바위병풍이 하늘높이 치솟아 있다. 울산바위가 아닌가. 구름이 바위를 감싸고돈다. 학생시절 수학여행 때 신흥사 쪽에서 계단을 타고 울산바위를 올라간 경험은 있지만 속초 쪽에서 울산바위를 쳐다보는 느낌은 또 다른 감회와 신비감을 안겨 준다.

미시령에서 속초 쪽으로 내려오면 먼저 마주치는 곳이 '순두부 음식촌'이다. 두부 음식과 황태로 유명한 곳이다.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음식점이 모두 두부나 황태로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다. '옛골순두부'라고 씌어진 곳에서 점심(5000원)을 해결한다. 내일부터 이곳에서 '순두부음식축제'를 연다고 한다.

▲ 비선대의 쇠구름다리
ⓒ 김영명
설악온천지를 지나 목우재를 넘어 오후 1시 30분경 설악의 본산 격인 외설악, 설악산국립관리사무소가 있고 호텔이 밀집해 있는 곳에 당도했다. 차량이 설악파크 호텔 부근에서 밀리기 시작하면서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러다가는 예정된 코스를 다 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500m 거리를 1시간 가량 지체해서 겨우 주차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백담사매표소에서 끊은 입장권(설악산 내에서는 하루 동안 유효)을 여기서 보이고 통과한다. 목표지는 비선대를 지나 천불동 계곡의 귀면암, 그리고 양폭 산장까지 가기로 작정을 한다. 천불동 계곡이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하는데.

매표소에서 소공원을 지나 마고선녀(麻姑仙女)가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비선대까지 3km 길은 평탄하다. 단풍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평범한 산행길이다.

그러나 비선대에서 왼쪽으로 쇠다리를 지나서 올라가노라면 계곡은 깊어지고, 산세는 울울창창으로 산봉우리는 뾰족하니 솟구쳐 오른다. 바위 틈 사이로 비집고 올라간 칡넝쿨의 잎사귀는 황금빛으로 눈부시다. 계곡 물가까지 드리워진 새빨간 적단풍의 잎은 유혹하는 여인의 교태인가.

▲ 천불동 계곡의 단풍1
ⓒ 김영명
너른 흰 바위 위로 흐르는 물에 주황의 떡갈나무 잎이 동동 떠내려오는데 바위 모습이 귀면 같다 하여 이름붙인 귀면암은 아직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돌밭 길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지쳐서 오르기를 포기한다. 지친 사람 홀로 두고 계속 갈 수 없는 일, 양폭 산장은커녕 금강산의 만물상에 비견되는 귀면암까지도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발길을 돌린다.

아쉬움을 붉게 채색된 단풍잎으로 달래면서 비선대로 내려왔다. 그동안 참고 있던 배뇨현상을 비선대 산장에서 해결하려고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대도 화장실이란 안내표지가 없다. 할 수 없어 물건 파는 가게 종업원에게 물었다. "저 쪽 바깥에 있어요" 고개만 좌로 튼다. 고개 돌린 쪽으로 나와서 이곳 저곳 기웃거려보지만 화장실 같은 곳은 없다.

마침 2층에서 등산객 한 사람이 내려오기에 물었다. 2층에 있단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신진대사를 보고 내려오면서 설악산 관리소장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비선대에 공중화장실이 없다니 될 말인가. 개인 산장의 화장실에 화장실 표시도 안한걸 보면 사용을 꺼리는 모양인데, 물건 팔 생각만하고 손님 서비스는 뒷전인 산장 주인도 나쁘지만, 화장실 문제를 산장주인한테 일임하고 나 몰라라한 당신이 더 나쁘다.'

▲ 천불동 계곡의 단풍2
ⓒ 김영명
시간이 나면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산성에 올라 권금성을 답사할 계획이었으나 너무 늦어 버렸다. 귀면암 오르느라고 땀을 많이 흘렸으니 몸을 씻는 데는 온천이 최고. 목우재를 넘으면 바로 설악온천지역이다. 설악산 주위에는 4곳의 온천지역이 있다. 척산온천(속초시), 설악온천(속초시), 오색온천(양양시), 원암온천(고성군)이 그것이다.

설악온천의 '설악워터피아'는 한화그룹에서 운영하는 종합레저온천장이다. 실내온천탕과 야외온천시설, 그리고 수영장 시설로 크게 구분될 수 있는데 대규모 시설이다. 수온도 40℃이상으로 높고 수소탄산나트륨형 온천이다.

▲ 설악온천의 워터피아 건물
ⓒ 김영명
오후 7시 이후는 입장료가 1만 원이란다. 폐문은 8시 30분까지. 땀에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서둘러 들어갔다. 실내온천탕의 누울탕(침탕)에 설치된 물안마 시설은 수압이 강력하여 안마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다. 등 쪽과 발바닥 쪽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는 강력하다 못해 발바닥이 아플 정도다.

몸을 씻고 실내온천탕을 나올 쯤에는 오후 8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폐문은 8시 30분이라고 적혀있는데 야외온천탕이나 수영장 등은 문을 닫기 시작한다. 둘러볼 여유도 없이 쫓기다시피 빠져 나왔다. 이제 예약해 놓은 숙소(한화리조트)로 들어가서 편히 쉬는 일만 남았다.

못 다한 설악산 구경은 다음을 기약하면서, 설악의 단풍과 온천을 향해 만해의 시 '님의 침묵'으로 안녕을 고하려고 한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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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난 해: 1942년. 2. 최종학력: 교육대학원 교육심리 전공[교육학 석사]. 3. 최종이력: 고등학교 교감 명퇴. 4. 현재 하는 일: '온천세상' blog.naver.com/uje3 (온천사이트) 운영. 5. 저서: 1권[노을 속의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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