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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법정에 서 있습니다. 형사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검사는 피고인인 그를 향해 공소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반성하는 모습보다는 억울한 마음을 내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가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면,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이제 이유를 알 듯합니다. 그를 처벌하려는 규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 해줄 것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에서 기각당하고 맙니다. 이제 직접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원을 제기합니다. 변호사는 피고인을 처벌하려는 규정이 헌법에 반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처벌받을 만한 행위를 했을까

그가 무슨 행위를 해서 어떤 규정을 위반했을까요. 그는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그런데 상영 전에 심의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전에 심의를 받지 않고 영화 상영을 한 것이 법 위반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영화법 제12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①영화(그 예고편을 포함한다)는 그 상영 전에 공연법에 의하여 설치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심의를 필하지 아니한 영화는 이를 상영하지 못한다.

만약 이를 위반하면 어떻게 될까요. 법은 처벌규정까지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화법 제32조는 벌칙을 규정하여 위와 같이 심의를 받지 않고 영화를 상영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율하였습니다.

사전검열이라면 법률로도 허용 안 돼

앞서 영화도 언론∙출판의 자유가 보호하는 대상이라는 판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헌법 제21조 제2항에 의하여 검열이 금지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시 영화법상 사전심의제가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에 해당한다면 그 자체로 위헌이 됩니다. 이러한 논리는 이어서 전개되는 논증에서 중요한 전제가 되므로 헌법재판소 판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헌법 제21조 제1항이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금지를 규정한 것은 비록 헌법 제37조 제2항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언론·출판에 대하여는 검열을 수단으로 한 제한만은 법률로써도 허용되지 아니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어떤 경우가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일까

결국 위헌 여부는 사전심의제가 검열인가 하는 점으로 모아집니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검열인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 쟁점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헌법 제21조 제2항의 검열은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로서 그 내용을 심사, 선별하여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즉 허가받지 아니한 것의 발표를 금지하는 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검열은 일반적으로 허가를 받기 위한 표현물의 제출의무, 행정권이 주체가 된 사전심사절차, 허가를 받지 아니한 의사표현의 금지 및 심사절차를 관철할 수 있는 강제수단 등의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헌법재판소가 검열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이후 사건에서도 계속 반복해 사용하는 기준입니다. 즉 ①표현물의 제출의무가 있는지, ②행정권이 주체가 되는지, ③발표되기 전에 이루어지는지, ④금지 및 심사절차를 관철할 강제수단이 있는지 등의 요건을 사안에 적용해서 검열 여부를 판별하게 됩니다.

당시 영화법상 사전심의제는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

당시 영화법 조문을 읽어보았고, 무엇을 검열로 볼 것인지 요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기준 요건을 법률에 적용하는 논증을 하면 사전심의제가 위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론은 복잡한 논리가 필요한 체계가 아닙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상식에 맞게 판시하고 있습니다.

"영화법 제12조 제1항, 제2항 및 제13조 제1항이 규정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심의제의 내용은 심의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가 영화의 상영에 앞서 그 내용을 심사하여 심의기준에 적합하지 아니한 영화에 대하여는 상영을 금지할 수 있고, 심의를 받지 아니하고 영화를 상영할 경우에는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한 것이 그 핵심이므로 이는 명백히 헌법 제21조 제1항이 금지한 사전검열제도를 채택한 것이다."

독립위원회도 검열기관이 될 수 있다

위와 같은 결론은 선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헌법이 금지한 검열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길목에는 한 가지 장애물이 더 숨어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 본 요건 중에 두 번째 사항과 연관된 쟁점으로 당시 공연윤리위원회를 행정주체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화체육부장관은 이런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공륜 위원이 예술·언론·방송·출판·공연·교육 등에 관하여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 중에서 위촉되고 있으며, 특히 영화심의위원은 영화감독, 평론가 등 영화전문가와 신문사 논설위원, 대학교수, 여류작가, 여성·청소년단체간부 등 민간전문인들로 구성되어 결국 자율적인 심의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점∙∙∙ 사전검열이라고 할 수 없다."(문화체육부장관의 의견 93헌가13 사건 및 91헌바10 사건)

사전심의제를 검열로 보지 않으려는 의도라면, 이런 주장은 좋은 핑계거리가 될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만 보아서 공륜을 민간기구라고 규정해서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요건에 탈락해 검열이 아니라고 마무리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검열을 행정기관이 아닌 독립적인 위원회에서 행한다고 하더라도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절차를 형성하고 검열기관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라면 실질적으로 검열기관은 행정기관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연윤리위원회가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율적인 기관이라고 할지라도 영화법에서 영화에 대한 사전허가제도를 채택하고, 공연법에 의하여 공연윤리위원회를 설치토록 하여 행정권이 공연윤리위원회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였으므로 공연윤리위원회는 검열기관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주문에서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립니다. "영화법(1984. 12. 31. 법률 제3776호로 개정된 것) 제12조 제1항 및 제2항, 같은 법 제13조 제1항 중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에 관한 부분은 각 헌법에 위반된다."

한국영화, 묶인 상상력의 날개를 되찾다

이 사건결정(전원재판부 1996. 10. 4. 93헌가13, 91헌바10 (병합))은 오늘날 한국영화의 부흥에 상당 부분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검열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한 여러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법원에 위헌제청을 해줄 것을 신청한 제청신청인의 의견서에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오늘날 한국영화 발전의 밀알이 아니었을까요.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선입견에 입각한 영화상영의 자유에 대한 제한론은 영상산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영화가 하나의 표현수단으로 일상적이며 대중적인 수단으로 정착한 현재에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다.

세계 각국이 영화산업의 육성,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만 사전심의제를 통하여 이를 규제함으로써 영화인들의 창의력을 말살하고 한국영화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제청신청인의 의견 93헌가13사건)

덧붙이는 글 | 위 글에 인용한 헌재결정례는 모두 전원재판부 1996. 10. 4. 93헌가13, 91헌바10 (병합)) [판례집 8-2,212~22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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