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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우리는 영화법상 ‘사전심의제’가 어떻게 위헌결정을 받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결정은 각종 사전심의제를 폐지하는 기폭제가 됩니다. 이후 헌법재판소가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음반 사전심의(1996. 10. 31),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비디오물 사전심의(1998. 12. 24),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에 의한 비디오물 사전심의(1999. 9. 16)를 잇따라 위헌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전심의제 위헌결정이 내려졌다고 해서 곧바로 영화에 대한 모든 심사 절차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제를 위헌으로 판시하면서 이미 새로운 제도의 등장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상영으로 인한 실정법 위반의 가능성을 사전에 막고, 청소년 등에 대한 상영이 부적절할 경우 이를 유통단계에서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미리 등급을 심사하는 것은 사전검열이 아니다." (영화법상 사전심의제 위헌결정에서)

사전심의제, 영화진흥법상 등급분류제로 다시 태어나다

영화법을 대체하는 영화진흥법은 사전심의제 대신 등급분류제를 규정합니다. 우선 관련된 법조문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21조(상영등급분류) ①영화(예고편 및 광고영화를 포함한다)는 그 상영 전에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상영등급을 분류 받아야 한다.(이하 생략)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상영등급을 분류받지 아니한 영화는 이를 상영하여서는 아니된다.
④영상물등급위원회가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상영등급을 분류함에 있어서 당해 영화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된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내용검토 등을 위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3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그 상영등급의 분류를 보류할 수 있다.
1.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을 때
2.폭력·음란 등의 과도한 묘사로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3.국제적 외교관계, 민족의 문화적 주체성 등을 훼손하여 국익을 해할 우려가 있을 때

제29조(영화상영의 제한)문화관광부장관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영화에 대하여는 그 상영을 금지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
1. 상영등급을 분류받지 아니한 영화

제40조(벌칙)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3.제29조의 규정에 의한 상영의 금지 또는 정지명령을 이행하지 아니한 자


<둘 하나 섹스>, 등급보류결정을 받은 것이 사건의 계기

새롭게 도입된 등급분류제도는 사전심의제와 달리 헌법에 반하지 않았을까요.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인지 판별하기 위해서는 이미 살펴 본 검열의 요건을 떠올려보아야 합니다. 가볍게 접근해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 조항이 영화진흥법 제21조 제4항입니다.

▲ <둘 하나 섹스> 중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위헌여부를 보다 세밀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실제 문제된 사건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낳은 계기는 이지상 감독이 연출한 영화 <둘 하나 섹스>였습니다.

이지상 감독은 신학을 전공하고 단편 영화계에서 문제작을 발표해오다 독립제작방식으로 장편영화를 찍습니다. 이 데뷔작이 <둘 하나 섹스>입니다. 시인 김수영의 시 세계를 죽음의 이미지로 보고 그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과 1999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 뉴시네마 부문, 2000년 스웨덴 괴테보르 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평단의 반응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7년 제작완료된 이 영화가 영화관에 걸리기까지 5년여 우여곡절의 세월이 흐릅니다. 그 중심에는 영화진흥법 제21조 제4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영화 상영을 위해 등급분류신청을 하자,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영화의 음란성 등을 문제 삼아 2개월의 등급분류보류결정을 하고, 보류기간이 경과해 재신청을 해도 같은 이유로 또 3개월의 등급분류보류결정을 한 것입니다. 결국 행정법원에 위 위원회를 상대로 상영등급분류보류결정의 취소를 구하는 소가 제기되고, 등급보류결정의 근거가 된 영화진흥법 제21조 제4항의 위헌성이 헌법재판소에서 다투어집니다.

헌법재판소는 문제된 법조문을 사전검열이 되는 요건에 대입해 결론을 끌어냅니다. 사전심의제 위헌결정을 한 기존 사안과 동일한 논리구조를 따른 것입니다. 물론 논리 틀이 같다고 해서 결론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관이 개입되는 부분에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이 사건의 경우 2명의 재판관은 합헌이라는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등급보류 횟수 제한 없는 것은 실질적 의사표현 금지에 해당

가장 문제되는 논점은 위 영화진흥법상 제도가 ‘의사표현의 금지 및 심사절차를 관철할 수 있는 강제수단’인가 하는 점입니다. 등급을 구분하는 행위만으로는 검열이 아니므로 합헌이라는 주장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다수 의견은 등급보류제도에 현미경을 들이대 정밀하게 판단하였습니다. 형식보다는 실질에 주목하였습니다.

"등급분류보류의 횟수제한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등급분류보류기간의 상한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가 발생한다.

이 사건 법률조항에 의하면 3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등급분류를 보류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3개월 이내의 일정한 등급분류보류기간이 만료된 뒤에도 등급분류보류의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 한, 즉 영화제작자가 자진해서 문제되는 내용을 삭제 내지 수정하지 않는 한 무한정 등급분류가 보류될 수 있다.

이는 비록 형식적으로는 '등급분류보류'에 의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는 한 무한정 영화를 통한 의사표현이 금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민간기구 아닌 검열기관

또한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독립된 민간기구여서 검열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배척되었습니다. 심사주체를 과거 ‘문공부장관’에서 ‘공연윤리위원회’로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바꾸고 다시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변경한 데는 행정주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숨어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행정기관인가의 여부는 기관의 형식에 의하기보다는 그 실질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하지 아니한다면 검열기관의 구성은 입법기술의 문제이므로 정부에게 행정관청이 아닌 독립된 위원회의 구성을 통하여 사실상 검열을 하면서도 헌법상 검열금지원칙을 위반하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형식논리에 빠지지 않는 관점을 유지하며 영상물등급위원회를 검열기관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그 위원을 대통령이 위촉하고, 그 구성방법 및 절차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으며, 국가예산으로 그 운영에 필요한 경비의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행정권이 심의기관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절차를 형성하고 있어 검열기관에 해당한다."

논지는 이렇게 모아집니다. 요컨대, 등급분류보류제도는 헌법이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전검열에 해당하는 것으로 비례의 원칙이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없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입장입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영화진흥법은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에 따라 다시 개정됩니다. 등급보류제도를 폐지하고 ‘제한상영가’라는 등급을 신설한 것입니다. 제한상영가는 종래 ‘등급외 판정’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런데 제한상영가 판정은 사실상 ‘상영불가’와 다름없다는 영화인들의 불만이 큽니다.

▲ <죽어도 좋아> 포스터
ⓒ 메이필름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으면 상영에 제약이 많고 일반 비디오 출시도 금지됩니다. 결국 영화사는 일반극장에 걸기 위해 문제되는 장면을 스스로 가위질하거나 모자이크 처리해 재심의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73살 할아버지와 71살 할머니의 실제 성생활을 담은 작품 <죽어도 좋아>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결국 화면을 어둡게 처리해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은 일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Vol.1'이 '제한상영가' 판정 받았을 때에는 등급분류 경향이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반국민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반사회적 내용인 경우'라는 제한상영가로 분류하는 기준이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또한 광고와 선전물을 제한상영관 안에만 게시토록 한 조항이 피해의 최소성이나 법익의 균형성 원칙에 벗어난다는 지적도 들립니다.

물론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무한히 누릴 수는 없습니다. 자유에 대해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하고 책임을 지울 것인지 그 한계를 가늠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숙제일 것입니다.

과제는 열린 공론장에서 풀어내야 합니다. 해법을 찾는 논의가 독선적인 주장에 가로막혀서는 곤란합니다. 작품을 직접 보지도 않고 남의 말만 듣고 비난하거나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내용을 끼워 맞추려하는 태도는 부당합니다. 불합리한 기준은 우리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이 다룬 사건은 전원재판부 2001.08.30. 2000헌가9[판례집 13-2,134~15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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